By 김현동 에디터 cinetique@naver.com
[2012년 05월 28일] - 이런 캐릭터에 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술안주 삼아 꺼낸 학창시절 이야기에 주먹 불끈 쥐게 하는 동창의 캐릭터. 한잔 술 들이킬수록 재수 없던 행실부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찌르지만 딱히 대꾸하기도 애매한 캐릭터. 늘 잘난 척에 주변 동기들 사사건건 시비 거는 캐릭터.
보고 있어도 짜증이 나지만 생각하는 것은 더욱 불쾌감을 주는 이들의 존재는 유독 사회에 나오면 빛을 발한다. 인맥, 학연, 혈연으로 얽히고설킨 삶 속에서 인상 찌푸리게 했던 일명 ‘잘난 척’의 주인공은 잘난 행실만큼이나 잘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득이 하게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일부러 친해지려 노력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일각에서는 한국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이라며 잘못된 병폐를 지적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목에 핏대 세워 외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한국 한국사회에서 잘난 캐릭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늘 부와 권력 두 가지 모두를 지니고 있는 법. 따라서 이들을 벗어나 잘난 놈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놈은 못난 대로 산다는 ‘세상은 요지경’ 노랫말처럼 세상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연극 모범생들 속 캐릭터가 딱 그렇다. 일명 공부깨나 한다는 범생의 탈을 쓰고 온갖 부조리를 자행하는 그들은 스스로가 사회의 심판자가 되기 위해 학구열을 불태운다.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좋은 성적과 그것을 빌미로 오를 수 있는 상위 1%의 특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닌 선택받은 자에게만 짧은 쾌락만큼이나 주어지는 순간이기에 목적을 달성키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렇게 펼쳐지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자행되는 초유의 사학 비리. 그 결과는 달콤한 결실을 안겨줬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머리 위에는 더욱 치밀하게 움직였던 잘난 척의 주인공이 그들을 심판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의지하는 것은 성경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신이다.
시궁창 싸움에 얼룩진 학창시절의 비애
될성부른 인재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비단 연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일련의 행동이 너무도 사회 속에서 보이는 현상과 비슷하다. 영화 친구와 말죽거리잔혹사를 연상시키는 그들만의 우정행각은 권력 앞에서 내 팽개쳐지고 돈 앞에서 한 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힘 앞에서는 더욱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마침 요즘 정치와 연관되어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추적자가 자꾸 생각나는 연유는 왜 일까?
학교라는 울타리 안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에 불과하지만 하는 행동은 최근 신문 지면에 연이어 장식하는 정치권과 권력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보고 있는 내내 왠지 모를 죄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연극은 그렇게 어른들의 못난 행동에 대한 단죄를 연기를 통해 비웃고 있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도 정곡을 찌른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성적은 못 바꾸잖아”
“돈에는 흰 봉투. be white 왜 그런지 알아? 어떤 돈이든, 깨끗해 보이거든.”
“이 학교가, 저 교문 밖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이 순진한 새끼들.”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단어만을 사용해 극 속 현상을 진단해낸 짧은 멘트.
연극 대사 이상의 호소력 짙은 메아리로 관객에게 외친다.
게다가 등장인물 스스로가 하는 행동은 비록 고등학생이지만 어른들과 다를 바 없다. 타인의 비리는 볼 수 없다지만 자신의 비리는 사회 정의를 세우는데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모습은 오늘날 정치 세태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 어디서부터 잘 못되었는지 스스로에 묻는 순간 연극은 모든 파국의 시작은 잘못된 첫 단추에 있다며 다시 처음으로 되돌린다. 연극 치고는 빠른 화면 전개와 시중일관 지속되는 초초함의 연속은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연극 모범생들.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가볍게 즐기며 지켜보기에는 꽤나 부담스럽고 무거운 작품이다. 혹자는 그랬던가. 연극 모범생들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무대 위에 끌어올린 느와르 작품이라고. 공감할 수는 없지만 회피할 수도 없는 묘한 이중적 잣대가 드리워진다.
부끄러운 연극 속 사회상
승자와 패자는 노는물이 달랐다.
다시 연극은 처음이다. 불이 켜지고 잘 나가는 검사와 회계사로 등장하는 주인공들. 과거에는 친구였지만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의 시선은 누구와 함께 했을 때 자신에게 더 이득이 되는 가에 집중 돼 있다. 게다가 이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건 과거 그들의 악행에 제동을 걸며 무릎을 꿇게 했던 전교 1등의 결혼식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승자와 패자는 태생부터 갈린다는 슬픈 현실이 연극 속 결론이다. 그들 나름대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고 이를 엿들은 꼴지 복학생을 방패막이 삼아 합류 시켜 모든 사건을 뒤집어씌우는 마무리 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그리고 사건은 떡잎부터 누렇던 싹을 잘라내는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의 기억에서 감춰진다. 따져보면 상위 1%의 잘못은 무슨 짓을 해도 감춰진다는 더러운 세상 속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좁은 무대에서 짧은 시간동안 학교라는 작은 조직을 통해 사회 전체의 문제를 꾸짖는 작품. 학생들의 소꿉장난이라 치부하기에는 그 과정이 치밀하고 정교하며 행동까지도 성인의 수준을 뛰어 넘는다. 게다가 그들 스스로의 신경전에 또 다른 피해자가 양산되었던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로 인해 빗어낸 부작용이 아닌 남으로 인해 내가 피해자가 되었던 그릇된 가치관을 합리화 시키는 행동은 보는 내내 경멸스럽다.
특별한 무대 효과나 거창한 음향 효과 없이 일련의 행동만으로 짙은 호소력을 발휘하지만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결국 ‘될성부른 인재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가치관이 연극의 메시지인 만큼 불편한 마음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고승덕 변호사의 저서 ‘꿈을 꾸며 노력하면 이루어진다’의 제목처럼 지금의 세상에서도 진짜 노력하면 이루어지는지 누군가에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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