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김현동(cinetique@naver.com), 정경학(자동차 칼럼니스트)
‘시대를 잘 못 타고난 비운의 명차’ 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는 기아 엘란(Elan) 을 기억하십니까? 지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기아 모텍’을 통해 생산·판매된 엘란 차량은 지금까지도 컨버터블 스포츠카로는 유일하게 한국에서 조립된 차량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엘란은 영국의 로터스(Lotus)가 M100(로터스 2세대)이라는 코드명으로 개발한 소형 로드스터(roadster) 차량이지만 불행하게도 경영난을 겪으며 GM에게 헐값으로 매각됩니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죠. 이후 조직에서 분사 형태로 브랜드 매각절차가 진행되면서 ‘로터스 브랜드’의 하나였던 엘란이 매각 되던 당시에는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던 기아가 협상 대상으로 거론되었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이 유일하게 보유했던 명차 브랜드로 기억됩니다. 물론 지금은 기아의 손을 떠났으며 기아자동차 조차도 현대자동차에게 인수되었기에 까마득한 오래전의 해프닝 정도로 보는 게 옳습니다.
이후에도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족보가 복잡하게 꼬였으나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로드스터 계의 악동 같은 로터스는 꾸준히 차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잊을 만 하면 신제품을 선보이면서 ‘아직 살아있다’를 외치는 형국입니다. 게다가 기아가 실패한 엘란 브랜드는 2013년 새로운 라인업으로 재 론칭되면서 로터스의 명맥은 당분간 지속되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일반적으로 로터스 차량 하면 경량화의 대표적인 차량입니다. 이유인 즉은 경량화된 차체하면 당시에는 섀시가 FRP(유리섬유)에 기인한 탓인데요. 오늘날은 탄소섬유가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물론 약하지 않냐고 우려할 수 있습니다만 참고로 AM제너넬사에서 만들어 미국에서 애용된 험비 또는 허머라고 불리는 짚차도 차체가 FRP를 사용합니다. 전쟁터에서 날라 다니는 차량이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니 FRP는 결코 약한 소재가 아니라는 말씀.
당시 로터스는 FRP와 알루미늄을 적절히 사용해 차량 무게를 1톤 이후로 줄였습니다. 비슷한 무게의 차량을 찾아보면 우리에게는 귀여운 경차로 알려진 쉐보레 스파크의 993cc 경차와 비슷하거나 약간 더 나가는 정도라면 이해가 되겠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기아를 통해 버림받고 고향으로 돌아간 상품이자 로터스 라인업 중에서도 한국에서 인지도가 있는 효자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로터스 엑시지 라는 모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형인 엑시지s입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탤런트 구준표의 애마로 등장해 이미지를 각인시킨 차량은 수퍼차져가 장착된 1800cc 에 불과하지만 제로백이 4.3초에 불과했다는 놀라운 사실.
#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같은 디자인
경차보다 가벼운 차량의 특별함
제로백 4.3초의 비상함이 돋보여
2009년 초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열혈 시청자였다면 아마 이 차를 기억 하실 겁니다. 극 중 소이정(김범)이 탔던 오렌지색 스포츠카 로터스 엑시지S입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중복(中伏)을 앞두고 정통 퓨어스퍼츠카 로터스 엑시지S를 시승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에겐 죽기 전에 꼭 한번 타보고 싶었던 엑시지S가 이렇게 빨리 제 앞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습니다.
영국에서 날아온 이 작고 빠른 괴생물체는 알루미늄을 접착하여 만든 새시와 FRP로감싼 차체덕분에 차량 중량은 불과 935kg입니다. 참고로 마티즈 크리에이티브의 공차중량은 910kg라고 하면 쉽게 상상이 되시겠죠?
전체적인 외모는 헤벌쭉 웃고 있는 천진난만한 개구장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홀쭉하게 들어간 허리라인이 아름다운 S라인을 연상시킵니다.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분에 거대한 사이드 에어인테이크홀이 위치하고 있고 엔진룸 후드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리어윙이 장착 되어있습니다.
사이드미러는 오로지 손으로 직접 조절이 가능한데 조수석쪽 미러를 조정하려면 좁은 실내공간과 버킷시트 때문에 밖으로 내려서 움직여야합니다. 옛날에 국민경차 티코 이후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조작법이라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후륜 범퍼 위에 얍삽하게 자리 잡은 리어스포일러는 고속에서 적절한 다운포스를 생성하며 접지력을 향상시켜줍니다.
# 지치지 않는 심장. 1.8리터에 4기통
오직 달리기 위한 차량
필요한 것은 오직 담력뿐~
엑시지S의 2ZZ-GE엔진은 도요타 제 1.8리터 4기통엔진에 슈퍼차져를 얹어 0-100km/h 가속을 4.3초 만에 끝낸다고 하는군요. 밖에서 도어를 여는 방식은 참 독특했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키를 꼽는 부분을 눌러 여는 방식인데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 엄지손톱이 다 부러질 것 만같은 기분이 듭니다.
엑시지S는 실내공간에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알루미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인테리어는 로터스이기 때문에 오히려 흥미로운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마치 책상 밑을 기어 들어갈 때처럼 몸을 구겨 넣어야 할 것 같은 비좁은 입구를 보며 '이걸 어떻게 타지'라는 고민을 우선 3초 하게 됩니다.
일체형 버킷시트는 옆에 지나가는 투스카니조차 올려다보게 만드는 시트포지션을 제공해주며 시트에 등받이 조절 따위는 사치일 뿐 허리를 꼳꼳히 세우고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시동을 걸자 커다란 배기음이 울려 퍼집니다. 처음엔 미드쉽 후륜구동 스포츠카라 조작에 어려움이 있을까 걱정을 하며 1단 기어를 넣고 조심스럽게 출발을 하는데 의외로 클러치조작이 익숙했고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rpm이 하강하는 속도가 빨라 빠르게 변속을 해줘야 촥촥 감기는 맛이 또 일품입니다. 신호등에서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풀악셀을 밟으며 8,500rpm까지 쥐어짰더니 그 속도와 사운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 1단에서 가능한 최고속도는 약 60키로
더위도 식히지 못하는 에어컨
덥다고 탓하지 말자! 숙명이다.
1단만으로 낼 수 있는 최고속도는 약 60km/h.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엔진음 + 배기음에 차량에 장착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시대 목소리는 소음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오로지 엔진사운드가 음악인겁니다. 지구를 녹여버릴듯한 뜨거운 날씨에 엑시지S의 에어컨은 작동을 하는지 안하는지 시원치 않습니다. 차량의 성능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위해 에어컨 성능을 낮춰놓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썬팅이 안된 앞유리를 탓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에 표정을 일그릴 순 없고 평온한 듯 웃어야지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기 위해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찾아갔습니다. 역시나 튀는 오렌지색 컬러와 주위를 울리는 압도적인 배기음에 '페라리도 아니고 람보르기니도 아닌 이 주먹만 한 차는 뭐지?'라는 표정으로 마치 주인공이 된 듯 사람들이 쳐다보며 구경을 합니다.
기본으로 장착된 요코하마 A048타이어는 노면을 꽉 쥐어 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앞 195 50 16, 뒤 225 45 17로 앞 뒤 다른 사이즈의 타이어가 끼워있습니다. 엑시지S의 단단한 서스펜션과 타이어, 그리고 버킷시트 덕분에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기도 하며 코너링 성능은 감탄사를 연신 내뱉을 정도로 코너 앞에서 그 어떤 두려움도 없애줍니다. 쭉 뻗은 도로보다는 역시 이런 와인딩 도로가 더 어울리는 엑시지S입니다. 연속된 코너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자세를 잡으며 코너를 돌아가는 맛은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엑시지S에 달린 전자장비는 TCS가 유일한데 정지 상태에서 약 4,000rpm을 띄우며 스타트를 해도 타이어 스키드음은 들리지 않고 그냥 스르륵 튀어나갑니다. ABS나 ESP, 파워핸들 따위의 장비는 엑시지S에겐 사치일 뿐!!!
돌아오는 길 신호 대기 중에 갑자기 포르쉐 카레라S가 뒤에 서기에 풀악셀로 도망을 갔더니 좀처럼 멀어지지도 않고 앞이 번쩍 들려서 미친 듯이 쫒아오던게 기억에 남습니다. 자유로에 진입하고 그 뒤로 약 30분가량을 같이 달리며 즐거운 드라이빙을 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엑시지S를 타고 난 뒤 나중에 꼭 세컨카나 서드카로 마련하여 주말에 서킷에 나가 달릴 상상을 합니다. 어렵지 않은 운전으로 저에게 매우 높은 재미와 흥미를 주었던 엑시지S는 제 마음 한구석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음. 근데 차량가격이 8천500만원이네요. 흥미는 있지만 더위를 많이 타는 저는 에어컨이 시원찮아서 일단 구입 목록에서 제외시키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