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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배고파6 :: 일상에서 삶의 소중함을 찾다.

생활/문화/리뷰

by 위클리포스트 2012. 6. 2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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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대표되는 최근 세태는 물질만능주의의 표본 그 이상의 이기주의가 야기한 것입니다. 너와 나로 표방하는 우리라는 단어가 아닌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유아독존으로 대표되는 변화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입히고 있죠.

점차 희석되어 가는 가족애 문제의 본질도 팍팍한 삶에 기반을 둔 것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만은 정작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이는 가족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이와 같이 소중한 가족이 우리의 곁을 떠나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 시한부 삶을 살게 된 주인공.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면?
+ 통장과 아기 신말, 이모가 남긴 마지막 선물에 진한 감동.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만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있을까.

미처 깨닫지 못한 자의 때 늦은 통곡은 아픔의 또 다른 표현이다. 변함없이 곁에 남아줄것만 같았던 이의 존재가 어느 날 세상에서 지워져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자도 받아들여야 할 당사자에게도 몹시도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혹자는 말한다. “있을 때 잘하자!”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않던가! 그래서 보는 이에게도 복잡한 감정을 남기다.

연극 배고파6는 이별에 관한 소회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재차 반복된다.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서 내려진 사형선고. 꽃다운 20대 나이의 아가씨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지만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누군가 당신에게 죽음 앞에서 태연해질 수 있나요? 라고 묻는 다면 연극은 그에 대한 사례를 제시한 셈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속으로만 삭히며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 사연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국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기에 체념한 듯 보일 뿐이지 그 심정 오죽하겠는가.

만남이 있다면 기간에 차이가 있을 뿐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다만 우리는 당연한 일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토로한다. 잘 만나는 것만큼이나 잘 헤어지는 것도 필요한데 그렇지 못했을 뿐인 것을. 연극 배고파6는 이별을 앞둔 현대인에게 이별하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시작부터 눈시울을 적시는 이별 스토리, 주인공이 처한 가슴아픈 사연 한 번 들어보자.



|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습니다.

보고 있으니 답답하다. “나 아파요. 병원에서는 죽을지도 모른데요” 외쳐줬으면 하지만 그게 그리도 어려울까? 보는 이도 답답한 민서의 행동.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무거운 입을 열지 않는다. 간혹 밀려오는 고통은 진통제로 간신히 달래며 가족이라곤 하나 뿐인 언니 앞에서 막내의 전매특허인 애교를 부린다.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싶은 언니 영희 앞에서 꺼져가는 생명줄 부여잡고 행복을 빌어주는 모습 공감하기 어렵다.

왜? 저러는 걸까? 라는 의문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말 못했던 사연이 공개되자 그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부모 없이 자란 지난 날. 언니 영희는 남들에게는 비난 받는 술집 여사장 일지 몰라도 민서에겐 엄마이자 언니 그리고 세상에서 유일한 혈연이었던 것. 술 팔아가며 악착같이 번 돈으로 민서 뒷바라지 했으니 흉한 모습일 지라도 열심히 살아온 방증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동생이 간신히 성인이 되어 꽃을 피워야 할 나이가 되었건만 정작 그와 맞닥뜨려진 현실은 죽음. 위암 말기라는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해야 되는 상황이다.

그랬다. 자신이 아픈 것 보다는 언니가 받을 충격이 더 버거운 것 때문에 민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인연의 고리로 연결된 이들의 모습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말해줬으면 하는 생각 어떤 관객이 다르겠는가. 지극히 공감되지 않는 상황에 답답한 마저 안겨주지만 마음 한편 안쓰러워지는 애잔한 감정은 내 일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남다르게 다가온다.

| 언니에게 가족을 선물하고 싶었다.

민서의 선택을 달리 보면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간신히 숨긴다 한 들 나중에 혼자 남을 언니의 아픔은 무슨 수로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수시로 재발하는 고통을 약으로 버텨가며 언니 앞에서는 밝은 미소를 보여주고 싶은 민서의 선택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민서도 나름 생각한 것이 있다. 자신의 빈자리를 오랜 시간 언니 영희를 짝사랑해온 영업부장 찰리가 대신 채워줬으면 하는 속내다.

이 와중에 아무것도 모르던 영희는 찰리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고, 민서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속상하기만 한 영희는 자포자기로 찰리와 하룻밤을 보낸다.

“너도 내게 들어오고 싶니. 이 밤이 지나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거다”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둘은 본능에 몸을 맡긴다. 동생은 시한부 인생에 죽겠다고 하는데 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육체를 탐닉하는 과정이 어리둥절할 뿐이다.

민서가 이런 것을 바랐던 것인지. 하룻밤에 영희는 찰리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둘 에게 남은 것은 이제 가족의 탄생이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던 영희는 찰리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불편하며, 자신이 내 뱉었던 말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이의 바램은 소박했다. 민서의 소망을 들어주겠다는 찰리와 뒤에서 이 내용을 엿들은 영희가 한 때늦은 후회에 관객도 눈시울이 시큰하다. 불 꺼진 무대 위에 흐느끼는 울음소리.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의젓하게 언니의 행복을 빌어주고 찰리를 믿어주는 민서의 모습에 관객도 힘을 받는다. “민서야~ 조금만 더 살아주면 안되겠니” 라는 진솔한 마음이 샘솟는다.

| 소박한 행복의 소중함을 알게 하다.

“인간은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도, 좋아하는 이들이 옆에 있어도, 그것은 영원하지 못한 한순간의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외롭기 마련이다.” 엄마, 나 또 올게 의 홍연녀 작가는 자신의 도서에서 위와 같이 표현했다.

유독 현대인이 겪는 심적인 배고픔을 은유적으로 미화시킨 작품인 연극 배고파. 4탄과 5탄에 이어 6탄을 통해 배고픔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외롭다는 단어를 직설적으로 사용한 이전 작과 달리 6탄에서는 외롭다는 것을 우회하여 표현한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민서는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언니 영희의 희생에 자신만 행복 했던 사실이 불편했을 뿐이다. 분에 넘친 행복을 선물해줬지만 그 행복 꾸릴 수 없게 된 것을 알게 된 민서의 선택은 언니가 한 명의 여성으로써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소박함 바램이다.

서서히 꺼져가는 촛불마냥 민서의 생명은 타 들어갔지만 반대로 언니의 행복은 살아나는 불씨 마냥 불붙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의 빈자리 채워줄 형부 찰리의 등장과 언니에게 삶의 기쁨이 되 줄 아기의 존재가 민서에게 또 다른 행복이 되었음을 아는 순간 관객의 흐느낌도 줄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난다고 하지 않던가. 이 순간만큼은 뿔이 나도 괜찮다 싶다. 민서는 떠났지만 민서가 남기고자 했던 그 마음은 진솔 되게 전달되었으니 오랜 시간 마음 한 편에 훈훈한 감정 변치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민서의 빈자리에 남았던 통장과 이모가 주는 신발을 신을 아기를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초반에는 한 없이 아프던 작품은 어느 순간 삶에 대한 의미와 행복에 대한 철학을 만들어 냈다. 거창하고 화려하지 않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감사할 줄 알게 한 연극 배고파6. 행복은 멀리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우리 주위에 널린 세입 클로버처럼 가까이에 있었다. 단지 우리가 못보고 있었을 뿐.

writtened by Oskar (cinetique@naver.com) ⓒ인사이드 (www.dailyinside.net) 

* tag: 연극, 배고파6, 대학로, 공연, 리뷰,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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