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전이 중궁전 나인 자숙을 상대로 술잔을 기울이던 여름밤. 감찰 상궁인 최상궁의 눈에 밟힌 내관 구동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날 밤 동궁 숙직인데도 중궁전을 기웃거린 것이 이유다. 왕세자가 실종된 것에 대한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왕과 중전, 상궁과 내관, 자숙과 구동 등 인물들의 얽힌 관계가 양파 껍질을 벗기듯 하나씩 드러난다.
보는 이도 어리둥절하다. 정작 제목과 달리 궁내 사건의 실체가 극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의 실체인 중전의 몸종 자숙과 내시 구동의 살구사랑 얘기가 더욱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신분과 배경에 가로 막혀 이뤄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왕세자 실종사건'은 그렇게 관객을 궁궐의 높은 담 안에서 벌어진 은밀한 이야기로 끌어들였다.
| 역순으로 짜 맞춘 사건에 몰린 두 사람.
극 전개가 좀 특별하다. 순차가 아닌 역순으로 반복되는데 북소리를 앞세운 음향 효과 사이로 배우의 뒷걸음이 경쾌하게 이뤄지고 과거가 펼쳐진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같은 사연이 달리 해석된다. 왕세자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구동과 자숙을 궁지로 몰아넣고 사건을 추궁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늦은 시간 자숙이가 처소를 이탈하게 된 원일이 뭘까?” “구동은 동궁전이 아닌 중궁전을 기웃거리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 감찰 담당 최상궁의 기발한 상상력이 단연 돋보인다. 구동과 자숙이 몰래 만나 살구를 건네는 장면이 부각되고, 최상궁이 처소를 이탈하는 자숙이를 우연히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다양한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뱃속의 애가 누구 애냐"는 추궁과 “자숙이 왕의 승은(承恩)을 입었다" 는 사실 등이 궁궐 속 실종사건과 무관하게 펼쳐진다. 따지고 보면 정신없다.
매번 등장하는 장면에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보모상궁도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관람 포인트다. 무대의 어두운 구석에서 슬로모션으로 달리며 극박한 감정을 홀로 표출하는 보모상궁의 몸부림. 왕세자를 돌보는 일을 하는 보모상궁이 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왕세자가 실종되었으니 죽음을 당할 처지에 놓였을 테고 피하기 위해 정신없는 상황을 이 같이 표현한 것. 내심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기발한 행동으로 완성됐다.
작품의 클라이맥스이자 구동이 자숙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극의 후반부에 나온다. 중전의 몸종으로 궁에 들어가게 되는 소꿉놀이 친구 자숙을 마을 어귀에서 배웅하는 구동은 자숙에게 줄 마지막 선물을 고민한다. 그리고 동네 어귀의 살구나무에서 살구를 따려고 애쓰지만 손에 닿지 않고 허공에서 스치는 손짓에 자숙은 "멍청이" 소리를 남기고 떠나버린다. 그 한 마디를 떨치지 못해 미련으로 남은 구동은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가면서 과거 두 사람의 이뤄질 수 없는 사연이 애틋하게 밝혀진다.
| 제목과 엇박자로 움직이는 작품
왕세자 실종사건은 전체적인 진행만 보면 추리극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슬픈 멜로극이다. 그렇기에 제목과 내용이 따로 논다. 모든 것을 뒤 흔들 정도로 중요한 사건인 왕세자 실종은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다가 마지막에 잠깐 언급 되는 것에 그친다. 그렇다보니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제목과의 연관성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관객이 극에 몰입할수록 시작에서 언급되는 왕 세자 실종사건은 기억에서 점차 '실종'되고 자숙과 구동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만 부각된다.
왕세자가 어떻게 실종됐는지, 범인은 누구인지, 살아있는지 등 그 어떤 단서도 제시되지 않고 점차 희미하게 엮어지는 사건만 두 사람에게 전가되는 형상이니 보는 이로써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억지로 꾸며진 거짓 알리바이로 한 나라를 발칵 뒤집힐 수 있는 엄청난 사건. 게다가 반드시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거대 사건이 한 낮 미천한 신분을 가진 구동과 자숙 두 명에게 전가되는 형상이다.
따져보면 궁궐 실세의 책임 회피 사건을 역순으로 파헤친 작품. 그게 바로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이다. 결국 두 사람은 모든 사건의 책임을 졌고 관객에게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아픔만을 안긴 후, 극중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 희생양으로 부각됐다. 게다가 뮤지컬이지만 경극처럼 보이는 음악과 대사가 더해져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의 사건 전말은 점차 미궁에 빠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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