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얼라이언스 / 김현동 에디터 cinetique@naver.com
[2013년 11월 13일] - "애야~ 집문서랑 땅문서 여기 있다. 카메라는 농 안에 넣어뒀다."
오랜만에 집에 온 내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꺼냈다. 당시에는 당신이 떠난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속으로 "웬~ 문서 타령~"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다. 내게는 30년을 넘게 함께 지내온 가족과 이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기승을 떨치던 그해 겨울 응급실에서 호출한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서울 성모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환자분이 왜 오신 거에요? 너무 늦었어요. 준비하세요. 길어야 한 달입니다."
(아들 ) 무슨 말이에요?
의 : "모르고 오신 거에요? 치료할 수 없어요. 말기입니다."
아 : 얼마나 된 거에요?
의 : "이 정도라면 환자분이 무척 힘들었을 건데요. 모를 수가 없어요. 말하지 않았나요?
아 : 예…. 모르고 있었어요.
(아들 ) 무슨 말이에요?
의 : "모르고 오신 거에요? 치료할 수 없어요. 말기입니다."
아 : 얼마나 된 거에요?
의 : "이 정도라면 환자분이 무척 힘들었을 건데요. 모를 수가 없어요. 말하지 않았나요?
아 : 예…. 모르고 있었어요.
응급실에서 만난 전문의가 던진 첫마디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송두리째 던져버리라는 사망 통보 으름장으로 들렸다. 아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이제 작별을 준비하라는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준비도 그렇다고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기에 경황이 없었지만, 집에 연락했고, 그날 밤 어머니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후 횟수로만 3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의사가 1달이라는 생존 가능성을 무시하고 3년을 버티셨다. 체력을 소리 없이 갉아먹는 함암제와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결국 독한 마약성 진통제까지 입에 달고 다녔다. 이렇게 되는 상황에서도 집안의 대소사는 다 챙기던 아버지.
큰집 제사도 평상시와 같이 참여했고 암이라는 녀석에게 정복당한 병든 몸을 이끌고 40년을 종사했던 당신의 회사도 건강하던 당시의 모습과 같이 정시에 출근했다. 평사원에서 경영진까지 올라가 빛을 봤고 시계의 초침이 종점에 다른 마지막에는 경비라는 숭고한 직책을 자초해 당신은 그 회사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렇게 다시 추워지는 겨울의 시작에 이르던 12월 1일 오전. 다급한 목소리로 울려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얘야. 아빠가 멀리 가야 한다고 말을 한다. 어서 내려와야 할 것 같아"
그때까지는 심각성을 체감하지 못했다. 난 떠나신 지 6시간이 지나 당신이 계신 곳에 도착했고 빈자리가 나를 반겼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길에 자식 된 도리로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이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몹시 힘들었다. 불과 몇 일 전까지만 해도 누워 계시던 병실은 비어있고, 내가 찾아간 곳은 무거운 분위기의 영안실. 향내 가득찬 영안실에 들어선 난 한동안 멍한 모습으로 있었다.
"아버지. 왜 나 오는 것도 안 기다리고 가셨어요? 그렇게 바쁘셨나요."
가끔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면 카톡을 보냅니다. 물론 답은 없으시죠. 하늘에서 보고 계실까요?
# 가난한 어린 시절
작은 단칸방에서 돈 문제로 시끄러운 집
부모님 두 분 모두 맞벌이에 나서
그래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해
가난한 집안의 남자와 부유한 집안의 여자가 만나 이룬 가정. 시작부터 서로의 경제력은 차이가 컸다. 신분사회는 아니었지만 , 재력이 갈라버린 신분 차이가 분명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한 가정이었기에 늘 돈이 다툼의 단초가 됐고 어머니 또한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어린 애를 집에 두고 맞벌이에 나서야 했다. 당시에는 최대 호황이었던 보험판매 영업사원이다.
경제적인 '부'가 뭐였기에~ 늘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외가에서는 환영받지 못한 사위라는 꼬리말이 달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외가 문턱 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큰 외삼촌과 친하게 지내려 늘 애쓰던 모습, 늘 엄하게 호통치던 외할머니에게도 사위로써 인정받고자 명절 때마다 들러 싹싹하게 행동했다.
여느 집안의 시골 사람들이 그랬듯. 딸이 많은 집안에 모인 사위의 모임으로 외가는 늘 시끌벅적했다.
없는 살림에 빠듯한 살림에서도 생활비를 쪼개 친가와 외가 사이에서 긴장해야만 했던 당신의 위치.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기억 속에서 엄하던 외할머니는 결국 아버지께 닫힌 마음을 풀었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화목해지는 듯했다.
숫자가 59를 찍던 그해. 정년퇴직을 앞둔 나이에 당신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질 줄 누가 알았으랴! 평생을 일만 하며 가족을 부양하던 가장의 노년은 그렇게 밝지 못했다.
# 우연히 꺼낸 한 장의 아버지 사진
일본에서 교육받던 모습
철강 기술 수료 받던 예전 모습에 뭉클
당신은 철강 전문가셨죠.
당신이 떠나간 뒤 조용히 남은 유품을 정리했다. 우연하게 발견한 사진 뭉치. 당신께도 사진이 있었군요.
그랬다. 우리 가족은 다른 가족과 달리 대화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여행을 간 적도 없고. 단란한 가족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가족인척했다는 것이 더 옳았을지 모른다.
8시를 찍기도 전에 출근길에 나서던 아버지와 대학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고등학교 졸업 직후 바로 사회생활로 나선 나. 그리고 일찍 보험설계사 일을 하셨던 어머니. 그리고 공부를 꽤 잘해 전교에서 10등 이내에 들었던 동생은 늘 각기 다른 생활을 했다.
사진 속의 아버지는 환하게 밝게 웃고 있는 표정이다. 단 한 번도 못 본 표정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아주 어린 시절 당신께서는 노동부에서 철강 기술인력으로 선정돼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 국가에서는 '잘 살아보세~'라는 문구를 내걸고 너나없이 선진 기술을 습득하려고 혈안이 된 당시 아버지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철강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잡아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왔다.
그 당시의 사진으로 추정됐다. 동료와 함께 양손에는 무언가를 바리바리 들고 있는 모습. 그리고 수료증이라고 적힌 인증서. 적어도 30년 넘게 당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시발점이 아닐까! 우리 가족이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한 당신의 노력 결실이 아닐까!
장롱 안의 캐논 필름 SLR 카메라. 당신이 일본에서 직접 사 오신 고가 카메라였다. 기자라는 직업을 경험한 내게 남겨주신 유품이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 함평에서 서울로 상경한 아버지
단칸방에서 막노동부터 시작했지만 결국 고향
힘든 청년 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1인 3역을 혼자 견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당숙을 통해 아버지의 힘든 청년 시절을 접했다.
"너희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서 나와 함께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며 안 해본 일이 없다. 막노동부터 시작했는데, 결국 고향으로 내려갔지. 그때 못 내려가게 잡았더라면 여기에서 다르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단 한 번도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하지 않던 아버지. 이어 "참 외롭게 살아온 사람이야. 힘들게 살았지!" 이라며, 속내를 이야기해 주셨다.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가족을 챙겨야 하고, 조상도 챙겨야 했지만 가진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로 시작한 삶이었기에 더욱 고달픈 지난 세월. 두 아들에게 부족함 없이 해주고자 했으나 그리 못한 책임감에 늘 말이 없으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유품에서 유독 많이 나오던 복권. 1주일 전까지 사들인 복권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그 날에도 연체됐다며 카드 독촉장이 도착했다. 그 외에도 각종 청구서와 통장에는 잔액이 바닥난 지 오래였고, 보험사에서 지급된 치료비도 터무니없었다. 나와 동생은 형편이 안되었고, 어머니는 병시중에 여유가 없었다.
결국, 암과의 사투에서 아버지는 1인 3역을 해내며 3년을 견디신 것이다.
"죄송합니다. 큰아들이 너무 무능했습니다."
# 난 독립후손이다.
건국포상을 받으신 할아버지
대한민국을 건국하셨다는데,
난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 늘 궁금했다.
대한민국을 세우시는 데 공을 세우신 할아버지는 건국포상을 받으셨다. 대한민국 정부를 세우는 독립운동가에게 내려진 가장 최고의 영예라고 여겨지는 상이다. 그 후손이 가난하게 살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가난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풍족하지 못했다. 맨땅에서 시작했고 단칸방에서 두 아들을 키워내셨고, 대학까지 보내셨다. 그리고 가족이 머무를 수 있는 집도 마련했고, 병마에 온몸을 정복당한 이후에도 기우는 가세를 견고하게 세워 이층집을 마련해 두셨다. 나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가 머무를 수 있는 집을 지키는 건 이제 내 몫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이제 편히 쉬세요."
집을 돌아봤다. 곳곳에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화장실을 고친 흔적, 고장이 난 수도꼭지도 교체해 두셨고, 옥상의 방수공사도 해 두셨다. CCTV도 돌아가고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들) "왜 집에 CCTV가 있지?"
(엄마) "CCTV 때문에 사건만 생기면 경찰들이 찾아와서 영상 복사해 가는 거야~"
아 : "왜 꺼두신 거에요?"
엄 : "경찰서에서 CCTV를 설치해놔서 우리건 이제 안켜도 돼. 전기 요금도 줄일 수 있고"
(엄마) "CCTV 때문에 사건만 생기면 경찰들이 찾아와서 영상 복사해 가는 거야~"
아 : "왜 꺼두신 거에요?"
엄 : "경찰서에서 CCTV를 설치해놔서 우리건 이제 안켜도 돼. 전기 요금도 줄일 수 있고"
결국 말끝에서 돈이 나왔다. 어머니도 힘드신 것이었다.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는 더욱 힘든 삶을 사시게 되셨다. 보험에서 나온 건 없어? 평소에 들어놓으신 것이 있으니. 그래도 살 방도는 있겠지 이랬는데, 치료비 외에는 남은 게 없었고 그 돈조차도 부족해서 연체된 금액을 값어야만 했다.
# 병환이 깊어가는 그 무렵
병원에서 강요하던 2인실, 비용 부담 과다
아무리 돈을 만들어도 감당하긴 역부족
결국 남은 가족의 몫으로 남아
3년을 버티신 아버지는 2년 6개월을 손수 운전하며 치료를 받으셨고 6개월가량을 병원에서 지내셨다. 항암제의 투약이 늘어날수록 병원에서도 2인실로 갈 것을 권유했다. 결국은 보호자의 동의 없이 2인실로 옮겼고 하루 감당키 어려운 병원비가 내 몫으로 남았다.
▲ 아버지께서 운전하셨던 주인 잃은 차 한대
1개월 선고를 받은 난 500을 마련해 입금했지만, 그 돈은 불과 2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의료보험으로도 터무니없던 국가 지원정책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포기할 순 없었기에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밤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잡지사에는 원고를 기고해 돈을 마련했다. 이런 나를 보며 주변에서는 억척스럽다고 손가락질했다. 다니던 회사의 팀장은 다른 일을 하고 있느냐며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해댔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뵌 것이 지난 2012년 추석이다. "오고있니? 조심이 내려온나~" 이 한마디를 하시고 나를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어머니는 이 말을 하셨다. "네가 온다고 하면 청소기를 들고 니 방을 그렇게 청소하더라. 하지 말라고 해도 청소기를 시끄럽게 돌리는 거야~" 무뚝뚝한 아버지는 큰아들이 그리 보고 싶어 내 방을 소리 없이 청소하셨다.
그날 새벽 도착한 내가 본 아버지는 고통에 신음하던 뒷모습이다. 방에서 움츠리고 식은땀을 흘리시며 고통에서 하루하루는 버티고 계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셨고, 내가 왔다고 마트에 가서 곶감을 사 오셨다.
"곶감이 참 달다. 먹어봐라~" 이러시며 거실에 툭 던지고 가시던 모습. 이젠 다신 못 보는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 떠난지 1년
아직도 당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치료 포기 각서는 왜 서명했을까?
그게 아니었다면 살아계셨을지도…….
11월 초.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환자분이 난폭해져서 1인실로 옮겨주세요." 라는 독촉이다. 항암제의 투약량이 늘어나니 예민해지면서 발생한 현상이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주변 환자들이 불안해한다는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선 듯 "예" 이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루 병실 사용료만 15만 원.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비용이었기에 8인실을 고집했다. "1인실로 가는 것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비용을 감당할 형편이 안됩니다. 사정 좀 봐주세요"
하지만 병원은 보호자의 동의 없이 환자를 1인실로 이동했고, 또 하나의 문서에 서명하기를 요구했다.
'치료 포기 각서'
환자의 상태가 위급해졌을 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추가 시술을 포기하는……. 동의한다.
선고 시한을 3년이나 지낸 환자가 견디기에는 너무도 위급한 상황이라 병원에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고, 결국 현실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예. 동의합니다." 아버지 다음으로 집안의 젤 큰 어른이었고, 이미 3년간의 긴 간호에 몸과 정신이 황폐해진 이후라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아니 내가 부모였다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자식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불효자가 되었지만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새벽.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고용량의 모르핀에 의존하시던 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난 정신없이 운전해 고향에 도착했다. 빈소를 향했고, 장의사는 내게 상복을 내주었다. 그리고 집안 어른이 된 아버지의 평소 모습을 상기에 모든 것을 주문했다.
"장례는 천주교식으로 지내주세요. 아버지의 세례명은 아만도 입니다.
제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 관리 못 할 테고 풀이 우거지면 흉하니 화장 후 봉안(납골)당에 모시겠습니다.
리무진은 안 하며, 수의나 관은 화장해야 하니 젤 저렴한 것으로 해주세요."
30년 넘게 그렇게 뜨거운 용광로에서 철을 녹여 작품을 만드시던 철강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결국 뜨거운 불길에서 한 줌 재가 되어 조그만 항아리에 담겨 내게로 전해졌다. 전해지던 그 순간 뜨거운 기운을 아직도 기억한다.
"보고 싶습니다. 아무런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지 그냥 가셨나요.
곧 당신이 떠난 지 1주년이 돌아옵니다. 빈자리가 여느 해보다 더 크게 느껴집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