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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그는 누구?

IT/과학/리뷰/벤치

by 위클리포스트 2011. 10. 7.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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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테이션의 황제 스티브 잡스는 검정색 터틀넥 스웨터와 파란색 청바지를 입고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던 의욕적인 청년이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작되는 연설은 단호하고 명확한 어투로 빠르게 진행됐고 그의 연설이 끝나면 청취자는 짧지만 굵은 인상을 받았다.

대중은 숨기지 않고 말하는 직설적인 잡스의 화법에 매료됐고, 제품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 환호했다. 무엇보다 말과 다르지 않은 그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언론은 잡스가 거론한 내용을 연일 회자했다. 그렇지만 2011년 10월 6일 이후로 더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애플 CEO로 재직했던 잡스는 독특한 괴짜 최고경영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이후로 만 14년간 연봉으로 매년 1달러, 14년간 총 14달러만을 받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애플의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잡스는 지난(2010년)해에도 신주나 스톱옵션을 부여 받지 않고 1달러를 연봉으로 받았다. 아울러 1997년 애플로 돌아온 이후 보유하고 있던 550만주의 애플 주식 가운데 단 한 주도 매각하지 않았다.

그와 얽힌 다양한 여러 일화가운데 ‘잡스처럼 꿈꾸고 게이츠처럼 이뤄라’ 책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잡스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직원에게 “회사에서 하는 일이 뭐냐”고 묻고 이에 답을 하면 “하는 일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가, 된다면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만약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경우 직원을 그 자리에서 해고하는 등 단호한 결단을 내렸고 이로 인해 훗날 난폭하다 못해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게다가 잡스는 항상 소수 정예를 고집했는데, 초기 애플의 개발팀은 100명이었고 누군가 새로 고용되어 101명이 될 경우 기존에 있던 직원 중에 한 명은 나가야 했다. 이 같은 모습은 함께 일했던 동료들로부터는 '독재자'라는 악평을 듣게 했으며, 결혼 전 만나 첫 딸을 낳아준 여자(크리산 브레넌)를 버리고 친자확인 소송에도 자식을 외면하다 10년 만에 인정하는 악인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 인재확보에는 사활을 걸었다. 1980년도 전문경영인 영입과정에서 펩시콜라를 코카콜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어낸 존 스컬리 당시 펩시 부사장이 영입 제의에 신통치 않자  “평생 설탕물만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겠습니까”라는 말을 던진 후 사라졌다. 애플의 영입 제안에 시큰둥했던 스컬리는 잡스의 이 말 한마디에 곧바로 이직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 IT업계의 1위로 올려 논 1등 공신이라는 평가에 잡스만한 인물도 없다는 것. 잡스의 명언 가운데 "제품이 아닌 꿈을 만든다"는 문구는 지금의 애플을 키운 원 동력이 됐다. 아이팟과 아이폰 그리고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아이 시리즈의 대적상대는 지금까지도 구분 짓기 어렵다. 이제는 잡스가 없으니 생전에 완성된 제품의 전설은 영원히 유지될 공산이 크다.

심지어 2005년 졸업식 연설에서 암으로 인해 자신에게 드리운 죽음까지도 혁신의 도구로 이용해 찬사를 받았다. 애플은 잡스에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혁신의 도구였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 만약 며칠 동안 그 답이 'NO'라고 나온다면, 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삶을 대신해 변화를 만듭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바로 '죽음'입니다” - 2005년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문에서

애플을 위해 애플만의 삶을 살아온 잡스의 인생은 애플을 통해 시작했으며 결국 애플을 통해 매듭지었다. 때문에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고 주목 받아왔지만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것의 없다. 그렇기에 오는 25일 전세계에 동시 발간된 전기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책에는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잡스가 왜 죽음을 앞두고 공개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다. 

‘스티브 잡스’의 저자인 월터 아이잭슨은 6일 타임지 인터넷판에 “잡스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책을 통해서나마 알게 해주고 싶어 했다”고 입을 열었다.

잡스는 아이잭슨으로부터 그동안 철저하게 유지해왔던 사생활 보호원칙을 버리고 책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한 동기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해 “ 일 때문에 아이들과 항상 함께하지 못했다”며 “아빠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아빠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이들이 이해해줬으면 한다”고 고백했다.

| 미혼모에게 버려진 잡스, 세상을 호령하기 까지

지극히 인간적이던 잡스였지만 살아 생전 누구보다 차가운 나쁜남자라는 평가를 받아온 그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평범한 모습을 보였다. 생전 누구보다 완벽을 기했던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삶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스는 1955년 2월 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와 생모 조앤 심슨은 위스콘신대 대학원 재학 당시 캠퍼스 커플로 만났고 잡스를 임신했지만 잔달리가 시리아인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지 못했다. 미혼모에게 태어난 잡스는 결국 몇 주 만에 입양기관을 거쳐 폴과 클래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생모인 조앤 심슨가 얽힌 일화가운데 대학에 관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슨은 잡스의 입양을 준비하던 당시 잡스 부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주저 했으나 "스티브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에야 입양을 허락했다. 생모의 간절한 바람 덕인지 잡스는 평범한 노동자였던 입양부모 아래에서 평범하게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스티브 위즈니악과 팔로 알토의 휴렛 팩커드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대학 입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73년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리드대학교에 입학한 잡스는 철학을 공부했으나 생활고가 지속됐고 결국 6개월마에 중퇴해야만 했다.

가난한 양부모가 평생 모은 돈이 학비로 지출되고 있는 것은 입학 후에 안 일이다. 좁은 친구 방에서 같이 지내던 잡스는 대학을 중퇴한 이 후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콜라병을 반납해 5센트를 모았으며, 사원에서 1주일에 한 번 주는 식사를 먹기 위해 7마일(11.3km)을 걸어가기도 했다.

잡스는 이때의 후일담을 거론하며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돌이켜보면 대학을 그만둔 것이 평생 했던 결정 가운데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회자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 역경을 기회로 만든 배짱이 잡스의 성공비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잡스다운 배짱으로 삶을 개척한 잡스는 1976년 그의 나이 21살 때 5살 연상의 공학도 스티브 워즈니악을 설득해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얄토스에 있는 입양부모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하고 이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렇게 탄생된 컴퓨터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PC)로 불리는 ‘애플’이다. 77년에 내놓은 '애플2'는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 시키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80년대에는 IBM에 대항해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내놓았으나 화근이 되면서 잡스가 궁지에 몰린다.

차고에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 4,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20억달러의 가치를 지닌 회사로 성장했으나, 후속작인 매킨토시(애플 리사)의 판매가  시원치 못했다는 이유로 경영권 분쟁에서 도태되면서 그의 나이 30세 때인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컬리와 이사회에 의해 회사에서 쫓겨났다.

"나는 언제나 애플과 연결돼 있을 겁니다. 내가 희망하는 건 오직 하나, 내 인생이 하나의 실이라면 애플과 엮여 짜여져 있었으면 하는 겁니다. 내가 애플에 없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애플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1985년 플레이보이 인터뷰)












이후 넥스트사를 세우고 조지 루카스 감독의 루카스필름의 컴퓨터 그래픽 부분을 500만 달러에 인수해 ‘픽사’라는 회사를 탄생시켰다. 잡스는 10년간 6,00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이때 만든 애니메이션 1995년 '토이 스토리'가 재기의 발판이 된다.

1997년 넥스트사가 애플에 병합되면서 잡스는 자신이 만든 애플에 임시 경영자라는 직함을 달고 컴백한다. 쫒겨났다가 12년만에 돌아온 잡스가 꺼낸 첫 마디는 "위대한 제품을 만듭시다. 사람들이 응답해줄 것입니다." 였다. 그리고 2년 만에 적자 기업을 흑자로 전환시키며 부활의 신호탄을 쐈다.

그의 도전 정신은 각종 언론지 인터뷰에서도 잘 드러났다. 98년 포춘 인터뷰에서 "끊임없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의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라며 도전할 것을 강조했고, 2001년 아이팟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혁신이야말로 누가 리더인지 누가 모방자인지 분명히 구별시켜줍니다.”라고 두둑히 배짱을 부렸다.












잡스의 통찰력은 매번 시장에 먹혀들었다. 아이맥에 이어 2001년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을 내놓았고 2007년 아이폰 출시로 ‘대박’을 터뜨렸다. 2010년에는 아이패드를 잇달아 성공시켰다. 그 결과 적자 기업이던 애플은 잡스가 최고경영자를 하던 14년 동안 매출이 17배 뛰어올랐고, 영업적자는 지난 2분기에만  73억달러의 순이익을 거뒀다. 그리고 지난 10일에는 시가총액이 엑손모빌을 제친 1위 기업으로 뛰어올랐다.

| 게다가 잡스는 지독하게도 혁신에 굶주렸던 사람이었다.

2006년 NBC 뉴스에서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데 그게 상당히 괜찮은 일이라면 당신은 다른 일, 뭔가 멋지고 놀랄만한 일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일에 오래 머무르지 마십시오. 다음 번에 어떤 일이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는 말과 2007년 D5콘퍼런스에서는 “지금 당장은 위험한 것 같지만 그것은 언제나 좋은 징조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다른 측면에서 꿰뚫어볼 수 있다면 큰 성공을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고 말했다.

2007년 아이폰 1세대 모델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혁명적인 제품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고 강조했던 잡스는 2010년 아이폰 발표회장에서 “우리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실수를 합니다. 우리는 실수를 빨리 알아내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고객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최고의 회사가 된 이유입니다.”며 성공을 자신했다.

그렇지만 잡스가 받은 임금은 매년 1달러 씩, 14년 간 모두 14달러에 불과했다. 애플의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애플은 잡스의 여러 비용을 법인 차원에서 처리 했다.

잡스가 병가를 떠나 있었던 2008년도에는 병원비를 비롯한 80만달러의 비용을 잡스에게 지불했다. 또한 1999년에 잡스에게 보너스로 제트기 한 대를 선사한 내용이 연차보고서를 통해 알려졌다.

물론 잡스가 14년간 매년 1달러라는 황당한 연봉을 받고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보유하고 있던 디즈니 주식 1억 3,800만주를 통해 지급되는 배당금 약 4,800만달러 때문이다. 디즈니는 2006년 75억달러에 스티브잡스의 재기를 가능케 했던 픽사를 인수합병한 바 있다.

김현동 cinetique@naver.com

사진 : 비즈니스 인사이더 (http://www.businessinsider.com/steve-jobs-memorial-accomplishments-2011-10#steves-childhood-hom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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