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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되는 인생, 이렇게 살아도 되나요?

시사/정치/사회/트랜드/기획

by 위클리포스트 2019. 5. 2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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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뛸 수 있다면 당당해도 좋다.

[불혹에 쉬어가는 삶]




[2019년 05월 12일] - 남자 나이를 두고 마흔이라는 표현보다는 불혹에 유달리 의미를 두는 게 요즘 분위기다. 불혹이 뭐 그리 대수라고 우겨봤자 손해 보는 건 당사자다. 그 나이 먹도록 뭐 하고 살았어? 라는 소리에 괜한 자격지심이 드는 순간 난 지는 거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임에 책임감을 당연시여기고, 불혹이라는 이유로 그럴싸한 타이틀 하나 달고 있어야 사람 대우 받는 것을 거부해봤자 마치 그릇된 편견 한복판에서 ‘님들아 무례한 지적질 그만하시고요!’를 연발한 들 먹혀들지 않을 형국이다.

불혹[不惑]
나이 40세를 이르는 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


10대 초반에 비자발적으로 사회에 나와 발을 담근 것이 어느 사이 30년이 넘어 마흔하나를 바라보고 있다. 윗사람 눈치 봐가며 아등바등 살아온 것이 꽤 시간이 지나 국민연금 수령 조건 충족 120회를 벌써 오래전에 꽉 채웠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결혼해서 자녀 낳고, 내 집 마련해서 평범하게라도 살 수 있을 거라 예상했건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 마음처럼 이뤄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분명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했건만 이 나이 되고 보니 확연한 차이가 벌어졌다. 공무원 또는 대기업 타이틀 달고 시작한 동기와 중소기업 타이틀로 시작한 대다수 이들은 신분의 격차라 불려도 될 정도의 확연히 벌어진 간극을 마주하고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다. 과거라면 한창 일해야 할 나이임에도 오갈 곳 없이 떠도는 신세에 한 동안 깊게 내쉬던 한숨조차도 바닥나 지금은 영혼 없는 일상에서 막연한 탈출구만 모색하곤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경우 몸도 마음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자존감이 우르륵 무너질 거만 같기에 불혹을 지난 이 나이 들어서도 정신 줄 다 잡고 가급적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이 되면 달라질까? 별반 다를 건 없다. 오늘도 리쿠르트 메일 타이틀은 그럴싸하다. “***님을 찾는 구직 공고에요” 혹한 마음에 들여다 보면 매번 똑같은 낚시질이다. 매번 당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기대에 또 들여다 보고 아등바등 탈출구를 모색한다. 그만큼 마음에 여유가 실종된 지 오래다.

이렇게 사는 것이 답인가 싶은 때도 있다.
결혼해 애 키우는 친구들 푸념 듣고 있노라면

마음에 손을 엊고 진심으로 돌아다 본다. 열심히 살았나? 백번을 물어도 답은 변함없이 Yes. 틀어진 순간이 언제인가를 찾아보니 내가 따르고 존경해도 될 거라 믿었던 팀장이 원흉이다. 스카웃 제의를 받고 수년을고민하다 어렵게 발걸음을 옮긴 회사였건만 내홍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내치는 것이 조직사회이기에 살생명부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알아도 손을 쓸 길이 없다.

전날 통보하고 다음 날 짐을 싸서 나가는 현실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해 봤자 달라진 건 없던 그 당시.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먹고살지 라는 것에 대해 답안도 막막했고 이미 스텝 꼬인 커리어를 다시 풀어 원상복구 하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 그 이상으로 힘들었다. 나간다는 소식듣고 위로하던 동기와 연락이 끊기는 것도 예상했던 수순이지만 그 시기가 빠르게 도래하는 것을 경험하고 어찌나 심란하던지. 이런 게 바로 강자독식으로 통하는 사회인가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섭섭함에 기인했을 거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서야 그 시절을 돌이켜 봐도 당시에 살아남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싶은 의구심에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와중에 지인의 공통된 한소리는 ‘살기 힘들다’라는 외침. 결혼한 지 10여년이 되었을 테니 아이는 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겠구나 싶지만, 그 한편으로는 넌 가정도 꾸리고 기댈 터전이 있잖아! 싶은 부러움이 발동한다. 그래서 물어보면 “처자식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꿈쩍을 하지 않는다. 맞벌이라도 하자고 하면 못할 말한 것 마냥 표정을 짓는데, 넌 결혼하지 마라”는 말이 돌아온다. 내가 이 말 듣자고 한 말이 아닌데.

잘 나가는 동기는 그야말로 ‘불혹’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삶의 표상이다. 삶의 여유 플러스에 가족이란 든든한 안정감 플러스에 내 집 마련이라는 테두리가 더해진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내가 그 나이가 되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 있겠지 라며 그리워하던 모습이 자꾸 투영되는 건 부러움 탓일 거다. 지금도 이러데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어떠한 모습이 되어 있을까? 싶은 조바심에 가뜩이나 위축된 자신감은 바닥을 보인다.

어떻게 사는지 말 좀 해봐라면 애 크는 이야기, 부부 싸움 하는 이야기만 늘어 놓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회사에서 오늘 내일 하며 나가라는 소리에 정신없다는 걱정을 늘어 놓는 친구도 사방이다. 먼저 나와 길을 걷는 나 같은 사람이 있노라면 그들이 이제 과거 내가 걸었던 노선을 답습할 준비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결혼식 이후 좀처럼 얼굴 마주할 일 없던 친구와의 조우가 나이가 들수룩 다시 늘어간다. 누가 더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저절로 찾게 되는 동기. 그게 불혹을 기점으로 부쩍 잦아진 것임은 공통된 주제 탓이다. 바로 생존!

한창이던 그 당시 그 나이 그 시절에는 돌이켜 보면 먼 훗날 까마득한 ‘불혹’으로 불리는 아재 나이 연배 시절은 먼 미래에 불과했다. 군 복무와 대학 그리고 사회 초년생으로 흘려보낸 20대를 지나 30대에는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큰 것을 노리는 행보를 걸었다면 그 시기를 지나니 ‘안정’이 그토록 절실해졌다. 남보다 더 벌고 더 빨리 인정받아야 한다는 급급함의 결과를 이 나이 먹고서야 후회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때늦은 반성이다.

처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불혹을 넘겨 다시 시작점에 올라선 5년 뒤 나를 위해

전력 질주했건만 결과는 기대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여유 되면 여행가고, 여가 즐기던 그야말로 배짱이처럼 살던 동기 가리켜 ‘그렇게 살다간 후회한다’는 지적을 한 대가를 겪는 느낌이다. 분명 앞만 보고 달리면 먼 훗날 보상받을 수 있을 거야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비참한 속에서 때늦은 후회 하지만 그 나이에 그 시절에 겪어야 했던 경험을 하지 못하고 불혹을 지나친 내가 측은하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벅차다.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세워보는 계획이라면 먼 미래를 보고 이뤄지는 오롯이 나를 위한 나만의 투자 전략이다. 억한심정에 ‘혼자 사는 인생에 친구가 뭔 필요’라는 자포자기 마음도 가져본 들 정작 처해 보니 친구는 필요했다. 열심히 벌어놔야 써야 할 타이밍이 되면 나서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나이가 바로 불혹 이후라 본다. 남자라는 책임감에 떠밀려서가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인정하고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는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과거라면 내가 머문 이 사회에서 오직 순응이 답이라면, 지금은 불평등하고 부당한 것에 담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깨달음. 당찬 90년대 또래를 보며 ‘특이하네’ 라고 였겼던 것에 이제야 답을 찾았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조직에 순응해서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함을 왜 이제야 할 알았을까! 이렇게 된 마당에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너무 억울하기에 요즘들어 ‘다 남 탓이요’ 라고 우겨보는 패기를 마음껏 부리고 있다.

시간은 흘러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기에 두 번 후회할 수 없다만, ‘내가 뭐 어때서, 나름 사장님이라다’는 배짱을 내세운다. 비빌 언덕 하나 없던 과거에는 그래도 나였기에 잘 버틴 것이고, 지금 또한 나였기에 이 정도라도 하는 거지라는 자신감에 기대어 너 보다 내가 낫다는 표정은 그렇게 내비친다. 내가 좋아하는 이의 일정에 맞춰 밥 먹을 여유는 얼마든지 낼 수 있고, 동창의 한턱내라는 요구에 월급 끊긴 지 몇 개월 됐다는 핑계로 뻔뻔하게 없는 것으로 하자는 넉살도 부리며 말이다.

‘갑’과 ‘을’의 구도에서 불합리한 요구 맞서 ‘놉’이라는 한마디 할 줄 몰라 ‘고맙습니다’만을 연신 외칠 줄만 알았던 사내가, 어느순간 합리적인 계약이 아닐 경우 ‘곤란하다’는 목소리도 내고, 제대로 된 결과를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 지급이 필수여야 함도 강조한다. 뭘 믿고 저리 담당해. 라는 표정을 보이는 클라이언트 앞에서 ‘그 자리에 넌 평생 있을 거 같지’라는 속내를 보이지 못함이 내심 안타까울 뿐이다. 불혹이 넘어 깨우친 값 된 진실. 너무 바보 같이 살았기에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음을 왜 몰랐을까!


By 김현동 에디터 Hyundong.kim@weekly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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