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 김현동(cinetique@naver.com)
염지홍 블로그(http://passiondesign.tistory.com/) 바로가기
막 세탁이 끝난 옷이 철사를 꼬아 만들어진 옷걸이에 걸려 주인에게 인계됐다. 딱히 필요는 없지만 옷장 안에 서너 개는 걸려있고 흰색 또는 파란 색상으로 사용하는 이의 취향까지 고려한 세심함이 엿보이지만 세탁소에서 뛰쳐나와 세탁물의 구김을 방지하는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상당수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가격으로 다진다면 개당 80원에 달하지만, 옷걸이를 구매하기 위해 별도 비용을 지불하지는 않기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옷걸이는 짧고 굵은 본연의 역할을 마치고 무심코 버려지고 있다. 업계 추산 1년에 쓰이는 수량만 약 2억 5천개에 달하는데 한 번 쓰인 옷걸이 상당수의 종착지가 쓰레기통이라고 하니 골칫거리도 이보다 더한 골칫거리가 없다.
# 옷걸이를 상대로 심폐소생술 하는 디자이너
볼품없는 옷걸이의 인생2막, 이리저리 ‘뚝딱~’ 완성
이쯤되면 옷걸이 공예는 진귀한 볼거리!
하지만 투박한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고 다듬는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니 볼품없던 옷걸이가 작품으로 태어났다. 세탁소에서 쓰이는 철제 옷걸이를 이용해 작품을 만든다?’라고 설명하면 대다수 사람은 의아하게 생각한다. 언뜻 생각하면 옷걸이 한두 개로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수십 또는 수백 아니 수천 개의 옷걸이를 연결해 완성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쯤 되면 신기함의 정도를 넘어서 방송사에서 취재를 해갈 정도로 진귀한 볼거리다. 실제 ‘세상에 이런 일이’ ‘생활의 달인’등의 프로에서 다녀갔으며 아침코너 등의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그게 가능해?” 라는 의문은 작게는 스마트폰 거치대부터 크게는 침대까지 일상에서 쓰이는 소품으로 탈바꿈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냈다고. 옷걸이만으로 완성된 식탁에 마찬가지 재료를 가지고 완성된 의자가 세트로 구성되니 쓰임새가 돋보인다. 물론 제작에 사용된 것은 100% 옷걸이다.
쓰기에도 애매하고, 버리기에도 곤란한 옷걸이의 재활용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진귀할 정도다. 주인공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무심코 버려지던 옷걸이를 생활 필수품으로 탈바꿈시켜 옷걸이의 생명연장을 가능케 했다. 일반적인 고정 관념을 탈피하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이는 열린 디자이너 염지홍씨다.
#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할 것 같은 남자
‘만들어볼까?’ 고민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주저하지 않는다.
나의 성공은 모두의 도움으로 현실화 됐다.
염 씨를 소개할 때 영국 왕립예술학교가 빠질 수 없다. 한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개인 신분으로 정식 ‘입학’ 허가를 받아낸 인물로 염 씨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디자인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그가 영국 대학원의 입학허가를 받은 것에 대해 모두가 궁금해 했다. “방법이 뭐야?”라는 궁금증에 대해 염 씨의 답변은 단순했다. “그 분야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게다가 학비까지 스스로 해결해냈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닌 상황에서 몇 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를 조달한 것. 듣고 보니 이 또한 발상이 기발하다. “입학 허가를 받고 나니 학비가 필요해진 거죠. 지금 말로 하면 펀딩을 받은 겁니다. 염지홍의 미래에 투자해 달라. 내가 이런이런 공부를 하고 싶으니 도움이 필요하다. 는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서 해결 방법을 찾았습니다. 도움을 받고 나서 보니 저를 아는 분도 있었지만 저를 모르는 분의 도움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혹시 공부를 잘하신 건가요?” 답은 ‘전혀요~’로 돌아왔다. 염지홍씨도 20대 초반까지는 여느 대학생과 같은 일상을 보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고등학교 시절 ‘자율학습’이 하기 싫어서 학교에 거부 의사를 밝혔으며,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학교 측의 조건에 당당하게 ‘해당 학생은 자율학습을 희망하지 않습니다’는 서명을 받아서 제출한 것뿐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이 강했지만 나쁘게 말하면 밖으로 나도는 학생인 것. 그렇게 대학입학 시즌이 되었고 똑같은 고민을 했다고.
“미래가 두려웠죠! 저라고 다른 대안이 있었겠어요. 입학하기 쉽다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대학은 들어갔는데, 문제는 이란어를 배우는 학과였죠. 생각해보세요. 일본어, 영어, 중국어는 쓰이는 곳이 많은데 이란어를 사용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겠어요.” 고등학교 시절을 파란만장하게 보내고 대학을 입학했지만 하필 이란어과 이었기에 새로운 고민에 직면했다는 염 씨.
중동으로 취업할 것이 아니라면 사용할 기회조차 없는 대학 전공을 수학하고 있던 시기에 염 씨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이왕 이란어를 배우게 된 김에 이란이 어떤 나라인지나 알고 배우자. 는 궁금증이 발동했다고. 실행능력은 이 때부터 발휘됐다. 당시 1학년이던 염지홍씨는 가방을 꾸려 이란을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누가 봐도 당시의 행색은 배낭여행자와 같았지만 염지홍씨 스스로는 “이런어 전공자가 이란에 대해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포장했다.
무모한 것 아니냐? 질문에 ‘아니요’ 이를 계기로 이란어를 전공하겠다고 입학했던 학과에서 유일한 한 명의 이란 국가의 방문자이자 해당 대학교 역사를 통틀어 한 명뿐인 학생으로 기록됐다. 단순한 호기심이 모두의 부러움을 사게 했고 동시에 더 많은 도전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
#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오던 그 해
‘실패’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아직 이르기에
‘성공을 향해 진행 중’이 옳은 표현이라고 말하는 남자
그렇다면 왕립예술학교는 어떻게 입학하게 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해당 학교가 디자인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아니었다고.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에 대해 능력을 지닌 전문가만의 심화 과정으로 우리 생활에 어떻게 디자인을 접목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연구했으며, 개인, 사회 그리고 국가에 필요한 디자인에 대해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시선을 깨우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해라고 알려주는 것조차 없는 학교. 그 과정을 지나면서 어떤 곳에서 배울 수 없던 염지홍 만의 철학이 완성됐다.
한국에 돌아온 염지홍 씨는 본인을 ‘열정디자이너’라고 설명했다. 직업이 뭔가요? 라는 질문에 하는 게 너무 많아서 한 가지로 단정하기에는 어렵다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최근에는 책을 준비 중이고 사회적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 알려진 옷걸이 디자이너 활동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다양한 분야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때로는 사업가이자 어느 날은 강연가로 소개되면서 단상에 서고, 때로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아가기 위해 사회적 활동에도 앞장서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옐로카드 프로젝트’가 그렇게 완성됐다. 이 프로젝트는 책가방에 자동차 불빛을 반사하는 교통안전 옐로카드를 달아주는 것으로 교통사고가 빈번한 구역을 어린 학생들이 안전장치 하나 없이 다니는 모습을 보고 반사판에 착안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 고안한 것. 물론 여기에도 본인의 경험이 담겨있다. 과거 피자가게를 운영하면서 뺑소니를 경험했고 이때 반사판의 필요성을 터득했다
물론 초창기 옐로카드에 대해 주변에 제안을 했지만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스스로 알리고 도입을 종용하는 등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염지홍의 작은 행동은 세상을 움직였다. 이제는 전국 각지는 물론 정부 단체에서까지 옐로카드를 도입하고 싶다고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본 아이디어를 내놨을 때 혹자는 “작은 카드 하나로 뭘 바꾸겠다고?”라는 우려와 함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을지 모르지만 염 씨의 눈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로 보였다. “작은 부분이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해야만 했습니다.”는 염기홍.
독바위역 부근 쉐어하우스 ‘소풍’ 에서 만난 열정디자이너 염지홍 ⓒ김현동
작은 실행으로 큰 기회를 누린 경험을 토대로 확신했던 믿음은, 작은 관심 또한 큰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로 이어졌고 결국 어린이의 통학 안전에 대해 이해를 넓히고 중요성을 각인하는 계기로 발전했다. 지금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요청이 들어오면 할 수 있습니다. 며 우리 사회에 이로운 활동이라면 염지홍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재차 강조했다.
# 사회에 이로운 활동이라면 앞장설 계획
나의 경험과 능력이 필요한 모든 분야라면
내가 받은 도움 만큼 베푸는 삶 영위할 것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어봤다. 일단은 염기홍 이름 석 자를 달고 신간이 출간될 예정이다. 물론 처음 퍼내는 책이 아니기에 내용에 대해 기대 해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 책을 쓰는 목적 또한 간단하다. 염 씨 자신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출간하겠다는 소신과 철학이 바탕이 됐다. 물론 출판사의 제안 또한 있었다.
또한, 영국에서 배온 경험을 본격적으로 발휘할 계획이다.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디자인을 위해 갖춰야 하는 브랜딩 전문가다. 염 씨와 인터뷰를 진행되는 내내 등장한 것도 바로 브랜딩 활동이다. 이미 염 씨는 대학 시절 가업으로 운영했던 피자 전문점을 프렌차이즈 브랜드로 키운 바 있으며 그 시절에 대외 홍보/영업 활동까지 도맡아 안정화한 전력이 있다. 피자가 잘 팔렸나요? 라는 질문에 “잘 팔렸으며 지금도 잘 운영되고 있다.”는 설명이면 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서울시의 활동에도 지속해서 참여할 예정이다. 이미 염 씨는 박원순 시장과 특별한 프로젝트를 추진 한 바 있다. 그 경험을 기반으로 서울시민이 누려야 할 삶의 질 향상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접목할 예정이다. 과거에 염 씨가 그래온 것처럼 불편한 것은 고치고, 편리한 점은 더욱 편리하도록 개선에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이다. 물론 지위나 경제력을 막론하고 누구나 누릴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행복이라는 단어에도 손색없는 복지가 근간이 되는 목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설명했던 활동을 통해 돈은 많이 벌었을까? “아니요”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사실 염 씨가 지나친 모든 활동의 근본적인 첫째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추구했고 아직은 젊은 나이에 불과하기에 돈을 추구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경험을 통해 더 나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철학. 그러한 모습이 흡사 철학자를 연상시켰지만, 결론은 한 가지다. 만나본 염지홍 씨는 주관이 뚜렷했고 확고한 소신을 지닌 남자였다. 과거 투자를 통해 대학 납부금을 마련한 것 또한 그러한 진실됨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