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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고마워, 웃음과 눈물로 얼룩진 가족이야기

생활/문화/리뷰

by 위클리포스트 2011. 12. 1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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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통기한은 6개월. 길어봐야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연애기간을 극복하고 평생을 약속한 이들이 대견하게 보이는 것은 누구나 꿈꾸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랑의 영속성 때문이다. 물론 순탄한 결혼생활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 라고” 하지만 시대가 지난 요즘. 현대인에게 부부 싸움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권태기이자 또 하나의 위기다. 연애도 쉽지 않지만 ‘부부’라는 단어로 더 많은 날을 함께 살아가기란 더 힘든 것. 때문에 사랑으로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낸 중년 부부에 입에서는 ‘아이 때문에 살았다’라는 핑계 거리가 떠나지 않는다.

과연. 아이 때문에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생판 모르던 남녀가. 가정을 꾸리고 사랑의 결실을 맺고 오랜 시간은 함께 부대끼면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결혼 전에는 그렇게 깍쟁이처럼 굴었던 아내가 결혼 후에는 여자이기를 포기했다는 여느 연애 프로그램의 우스갯소리. 마냥 웃고 넘기기에는 씁쓸함마저 남기는 이 시대의 가정. 신혼 초반의 설레임은 어느 사이에 잊어버리고 내 반쪽을 향한 소중함도 점점 잊혀지는 ‘가족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

| 철부지 남편은 오늘도 앞치마를 두릅니다.

연극 여보, 고마워는 고시생이자 6년차 전업주부인 철부지 남편 ‘준수’(박준규, 서범석 분)와 그로 인해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며 슈퍼맘이 된 아내 ‘미영’(오정해, 이현경 분) 그리고 이들의 하나뿐인 8살짜리 딸 ‘지원’(주지원 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공연이다.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이 뒤 바뀐 채 살아가는 가정에서 남편은 늘 아내의 위세에 주눅 들어 어께를 펴지 못하며 살아가는 신세다. 친구도 만나고 모임도 나가고, 퇴근 이후 한 잔 소주로 시름을 달래는 여느 집안의 가장과는 달리 준수는 오늘도 출근하는 아내 미영의 출근길을 챙기고, 딸의 등굣길을 마중나간다.

세상 편견으로 바라보건데,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가정. 주변에서는 준수를 무능한 남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수다쟁이 이웃주민은 흉보기에 여념 없다. 아무리 그래도 남의 가정사를 그렇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안쓰러움 보다는 나도 모르게 공감하게 된다.

역시 남자는 직장을 다녀야 하고, 가장으로써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을 때가 가장 멋있나 보다. 하지만 철부지 남편 준수는 그렇기 못했기에 남들 눈에는 무능했고, 가족에게는 손가락질 받았고, 처갓집에서는 딸자식 등골 빼먹는 못된 사위라는 팻말을 달고 산다.

| 슈퍼맘 미영, 내게 남편은 ‘웬수’일 뿐

남편과 정 반대인 아내. 대학 내 스타강사로 불리는 아내 미영.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자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그녀이지만, 부양해야 할 가족이 둘 이나 딸려있다 보니 하루하루가 빙판길이다. 오랜 시간 고시 공부만 해온 남편은 직장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전업 주부의 길에 접어든 지 오래. “저 웬수를 취직 시켜볼까?” 생각을 안해본 것도 아닌데, 생각해보니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마냥 웬수다.

게다가 아빠를 쏙 빼 닮은 씩씩한 8살짜리 딸 지원이. 여자애라서 싹싹하고 애교도 넘치지만 학교에서는 엄마를 부르는 일이 잦아진다. 남편이 엄마 역할까지 제대로 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고, 딸은 학교에서 사고나 치며 점점 말썽쟁이로 성장하니 일에 집중 할 수가 없다.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환경에서 가정에서는 엄마와 아내로써 소임을 다해야 하며, 직장에서는 사회 구성원으로써 맡은 바 임무를 해결해야 하는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러한 고민도 사치에 불과하다. 남편에게 기대느니, 남편을 기대게 하는 것이 더 마음 놓이기 때문.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가진 그녀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의 무능함이 가장 큰 이유다. 마냥 서운함을 오랜 시간 마음속에서 삭혀가며 뼈빠지게 일하가며 뒷바라지 했더니, 그 웬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남편. 그런 웬수라도 미영에게는 사랑했던 남편이기에 좀 더 있어줬으면 바라고 또 바란다.

지원이 시집가는 날 딸 손잡고 예식장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소박한 바람은 지켜질 수 있을까? 희망이란 그렇게 야속한 것이다.


| 쉽게 하지 못했던 말 ‘사랑합니다.’

평범하지 않은 과정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부터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던 마음속 응어리를 다룬 연극 ‘여보, 고마워’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현대인이 소홀히 하는 고마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연극이다.

주최 측은 유쾌발랄한 가족이야기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웃음 보다는 눈물에 더 가까운 연극으로 초연 이후 이번이 세 번째 공연이다. 이번 공연에는 작년에도 함께 했던 박준규-오정해 커플이 또 다시 함께 호흡을 맞추며 열연을 펼쳤다.

극 중 대사도 참으로 진솔하고 정곡을 찌르며 남편의 입장을, 때론 아내의 입장을 대변한다. 알고 보니 고혜정 작가 주변의 이야기와 가족, 남편이 보낸 편지를 묶어 지난 2006년 발간한 에세이를 원작으로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것. 배우의 행동과 대사 하나 하나에 우리의 삶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관람 내내 공감대를 형성한다.

고혜정 작가의 현실적인 이야기와 공감가는 대사들과 조연 배우들의 감칠 맛 나는 코믹 연기가 웃음과 눈물이 공존하는 가족이야기로 새롭게 재탄생된 2010년 판 여보, 고마워. 초반 코믹적인 상황에 터지는 웃음을 시작으로, 극 후반으로 갈수록 밀려오는 감동으로 마지막에는 눈물을 훌쩍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며 손수건을 찾게 만드는 감동적인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후반 남편이 작성한 한 장의 편지다.

가까이 있음에도 평소 할 수 없었던 속내. 가장으로써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하나 뿐인 딸에게도 제대로 된 아빠 역할을 하지 못한 준수의 미안함이 절실하게 녹아 관객의 눈 시울을 적신다. 게다가 하나 뿐인 딸을 위해 평생을 다 바쳐 뒷바라지 한 친정 엄마의 대사도 심금을 자극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시한 번 일깨워 준다.

“함께 있음이 가장 큰 행복임을 일깨워주는 최고의 가족극”이라고 말하는 고혜정 작가, 중견 연극배우인 성병숙은 “이제는 자극적인 작품보다 일상에서 가족들의 생활이 달라지는 이런 연극이 필요할 때” 아역배우 주지원의 “아빠가 절대로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100% 공감하게 하는 연극 여보, 고마워.

일상의 소중함. 평범함의 소중함 그리고 함께 있어 소중한 모든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 안타깝게도 우리는 소중한 것에 대해서 너무도 하찮게 치부해 왔고,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돼서야 눈물 흘리고 후회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내게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하고.

말이 씨가 되며,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 길지 않는 세월. 아껴주고 챙겨줘도 부족한 시간에 자존심을 내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회복할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면 소리내어 ‘사랑합니다’는 말을 세 번 외치는 것을 권장한다.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때 내 삶의 모든 것이라며 애태우던 가슴 속 뜨거운 열정은 어디로 가버리고 원망만 남은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연극 여보, 고마워. 함께 있어 행복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표현하지 못했던 가족에 대한 가슴 벅찬 메시지를 전한다.

김현동 cinetiq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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