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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 동경하던 탈북청년. 서강잡스 김학민 CEO

IT/과학/인터뷰/칼럼

by 위클리포스트 2018. 2. 1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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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찾아 내려온 대한민국, 꿈을 이루다.
북한출신 아이폰 수리공 아닌 서강잡스 김학민 CEO



By 김현동 에디터 cinetique@naver.com


[2018년 02월 05일] -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라는 푸념이 입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평이 조금 더되는 비좁은 고시원이자 빛조차도 안 들어오던 비루한 삶. 세상과 단절하며 지내던 당시는 정말 비참했다고 회상했다. 희망은 물론 목표 하나 없이 자포자기 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비관하던 당시에는 이렇게 된 모든 이유를 순전히 남의 탓으로 돌리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서러움만 커져만 갔다. 몇 개월을 그렇게 보내던 어느 날.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줄 곳 책장에 꽂혀 있었던 스티브잡스 전기였다. 무심코 꺼내 들고 읽어 내려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뭉클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일어나 거울에 비친 모습을 들여 봤다. “너 모습을 봐! 뭐하고 있어? 이렇게 살려고 여기까지 왔니?” 라는 생각에 한 없이 부끄러웠다. 북한에서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 어렵게 도착한 이곳 대한민국.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자유 앞에서 무력한 일상은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탈북자이자 새터민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얼룩처럼 따라다니던 김학민 대표의 한국 생활에 변화의 계기는 그렇게 마련됐다. 그날 이후로 달라졌다. 비록 의지할 가족 하나 없이 혼자 내려온 이곳이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희망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한번 뿐인 인생, 희망도 없고 목표도 없이 이대로 흘러 보내기에는 억울했다.


스티브잡스 동경하던 탈북청년
201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입학.
하지만 뜻대로 안되던 대학생활
동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나이
대학서도 혼자인 외로운 일상.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어렵게 서강대학교 문턱을 넘었지만 문화의 차이는 너무 극명했다. 태어난 곳도 자라난 환경도 모든 것이 달랐다. 결정적인 것은 나이였다. 동기에 비해 한참 많았으니 그야말로 삼촌이라 해도 다르지 않았다. 쉽게 좁힐 수 없던 간극이었다.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다짐은 수시로 흔들렸다. 그러던 와중에 기회는 우연히 주어졌다.

김학민 CEO에게는 별것 아니던 아이폰 수리 모습이 주변 지인의 눈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장면으로 비춰지던 시기다. 사실 그는 북한에서 전자 제품을 수리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모두가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북한에서 등 뒤로 배운 기술은 요긴하게 쓰였다. 그 당시 김학민 CEO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한국이라면 한창 뛰어놀며 학업에 열 올리던 나이였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그러한 배려조차도 사치였기에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실전에서 몸으로 익힌 기술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김학민 CEO와 달리 대학 동기의 눈에는 그가 맥가이버와 동급으로 느껴졌다고. 우연찮게 SNS로 수리하는 모습이 퍼져나갔고 대학생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소문을 타며 서강대학교를 다니는 아이폰 수리의 장인으로 불렸다. 기숙사 복도에는 김학민 CEO를 기다리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오늘날의 서강잡스는 그렇게 태동했고 세상에 나갈 채비를 다졌다.


“전자제품 수리는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어요. 북한에서도 수리업을 했기에 제게는 쉬웠거든요. 사실 아이폰 수리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당연히 누구나 수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겼는데 실상은 그것이 정말 대단한 거더라고요. 그때 고민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로 나아가볼까? 라고요. 주저할 여지가 없었어요. 그래 본격적으로 해보자!”

이듬해 십시일반 지인과 학생회를 통해 모은 자본금으로 ‘서강잡스’ 간판도 올라갔다. 그렇게 빌린 자금은 한 달 만에 모두 갚으며 성장 가능성을 직감했다. 의심 반 두려운 반으로 시작했던 도전이지만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애시 당초 물러설 여지 하나 남기지 않고 시작한 도전이었기에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숙제였지만 이제는 성장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는 지난 1월 중순에 서강대학교에 1호점을 오픈했고 오는 3월에 가톨릭대학교에 2호점을 예고했다.

어렵게 다다른 지금의 자리. 한때 끝없을 것만 같았던 방황을 뒤로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 끝에 대학을 진학했고 오늘날 모두에게 젊은 CEO라는 소리를 듣게 됐다.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진 인터뷰로 알아주는 이도 늘었다는 김학민 CEO. 북한에 있었다면 지금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혹은 고시원에서 지내던 당시의 나약한 마음가짐으로 지내었다면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오늘에 이른 김학민 CEO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도약할 채비를 다지고 있다.


꿈꾸는 CEO 보다 행동하는 CEO
계획하고 실천하고 목표달성까지
느리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두려움과 자신감 없던 지난날 극복하고
가장 잘하는 일로 인정받아


서강대에서 서강잡스 하면 누구나 김학민 CEO를 외친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낸 호칭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 나이 또래 당연하게 지니고 있는 흔한 추억하나 없이 자라온 김학민 CEO. 그렇기에 수없이 되뇌며 성공의 길로 한 걸음씩 다다르고 있다. 말하지 못한 아픈 상처가 많아서인지 고민의 깊이도 다른 CEO. 비록 젊은 삼십대 초반의 길목에 접어들었지만 열정과 실행력 하나만은 20대 시절과 진배없었다.

지금까지는 아이폰에 한정해 수리를 진행했지만 와치 제품까지 수리 영역을 넓혔다. 물론 단순한 제품 수리 그 이상의 컨포넌트 단위 교체와 확장까지 포용하면서 보다 전문적인 수리 전문점으로 도약을 선언한 상태다.


서강잡스 김학민 CEO는 말한다. 아이폰의 수리는 누군가에게는 추억을 되찾아주고, 누구에는 새로운 추억을 안겨주기에 단순하게 제품을 수리해 동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님을. 그렇기에 오늘도 서강잡스 하나만을 보고 먼 길을 찾아온 한분 한분께 열과 성을 다해 문턱을 넘는 그 순간의 기대를 만족으로 보답하고자 수리에 임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과거 북한 거주당시에는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과정이라면 한국에서의 김학민은 꿈을 찾아 고민했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청년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김학민 CEO를 찾아오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폰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진단과 처방전은 계속 발급됐다. 혹자는 말한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태어난 이는 그 계급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러한 수저 계급론에 비견하면 김학민 CEO는 흙수저에 가깝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던 삶. 물론 그러한 세상의 편견에 김학민 CEO도 동의했었고 누구나가 선망하는 삶을 살고자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건 남의 눈을 의식해서였지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님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김학민 CEO 또한 한 명의 청년이자 좌절의 고배를 마셨던 경험을 거름삼아 더 많은 이에게 힘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느리지만 착실하게 오랫동안 진 빚을 갚고자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이미 탈북과정에 도움 받은 기관을 어렵게 찾아간 것도 이의 일환이다. 과거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아 오늘에 달한 것에서 배웠고 터득한 경험을 또 다른 이에게 전할 계획이다.

인터뷰를 끝으로 궁금한 것 하나를 물었다. 북한에 있을 당시 그토록 꿈꾸고 선망한 한국에 왔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접했습니다. 정말 멋졌습니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보고 꼭 한국에 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목숨 걸고 넘어온 한국에서의 삶은 드라마와는 달랐지만 제게 많은 기회를 주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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