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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촌놈의 서울 생활 10년. 고시원, 옥탑의 로망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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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클리포스트 2014. 2. 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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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다포세대 ]
서울 상경 10년차, 생존 Story
용산 탈출을 공모하다.




- 20대 중반에 상경한 서울
- 어느 덧 30대 중반
- 여전히 나는 가난한 월급쟁이
- 옥탑의 로망도 한때

글·사진 : 김현동 에디터 cinetique@naver.com


[2014년 2월 24일] - 20대 중반을 갓 넘기던 3월 초. 아무런 대책없이 서울로 상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학자금 대출의 압박에 못 이겨 무슨 일이라도 해서 갚아 나가라는 은행의 계시를 무시하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온 셈이다.

평생을 전라도 광주에서 그것도 군대를 제외하고는 집을 벗어나 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믿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이 더 앞섰다. TV에서 접했던 화려한 서울 생활 그리고 고가 외제차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 그것이 꾸며진 것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서울에 가면 누구라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건 순진한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는 커뮤니티 사장님이자 형님께 더부살이를 제안했다. 사무실이었지만 오피스텔이었고 따라서 화장실도 안에 있었고 게다가 세탁기까지 풀옵션으로 갖춰진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흔쾌히(O) 흥케이(X) '좋다'고 승락(X) 승낙(O)한 형님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무작정 사무실에 침투해 짐을 풀었다.

이후 내가 형의 로비에 사용한 것은 삼겹살 2키로에 불과했다. 당시에 고맙다는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 살았는가 모르겠다. 우랭이 형, 정말 고마웠어요.


대학 졸업 후 20대 중간을 갓 넘기던 시기
은행의 강압적인 대출금 상환 압박에 상경
단돈 5만원 들고 무작정 서울로 야반도주
갈 곳 없는 서울 하늘아래, 아는 형님께 더부살이 제안
서울의 중심, 용산에서 시작한 나의 궁핍한 인생


창문을 열면 한강이 보이고 그 옆에는 용산역도 보이는 전망 좋은 오피스텔이었다. 간혹 군부대 훈련에 있는 날에는 탱크와 장갑차가 용산을 가로질러 가는 통에 새벽에 잠을 깨 '뭐야~ 전쟁난거야~' 이러며 밖을 내다보기도 여러차레(X) 여러차례(O)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서울에서 머무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버틸수는 없었다. 사무실이 이전하면서 갈곳 없던 나도 조용히 묻어 가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옮겨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중에 가진 현금으로는 고시원 생활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사를 계획했다. 용산의 먹자골목 정중앙의 3층 건물의 3층 이었다. 여기 또한 화장실에 안에 위치했기에 더부살이에는 지장이 없었다. 단 세탁기는 아무리 찾아도 요원했기에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두 곳에서 세탁기를 사용해도 좋다는 승락(X) 승낙(O)을 받았다. 한 곳은 나보다 한해 먼저 올라와 서울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동기였으며, 다른 한 곳은 내가 근무하던 회사의 도움이었다. 오피스텔 보다는 불편한 것이 많았지만 그래도 이것이 어디인가! 는 생각에 견딜만 했다. 간혹 술에 만취한 회사 사람들이 맥주를 사들고 오는 것만 빼고는.


▲ 익숙해지면 버려지는 사회. 나의 삶도 익숙해질 수록 버려야 할 것이 많이 생겼다. ⓒ김현동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뒤늦게 고시원을 구했다. 이왕 혼자 지내는 몸이기에 출퇴근 하기 아주 가까운 곳이자 비용도 아껴야 하며, 창문이 있으면 더 좋겠다는 3가지 조건을 내걸고 용산 바닥을 쥐잡듯 돌아다녔다. 그러다 간판도 없는 마치 무허가 고시원 같이 생긴 곳에서 6개월의 선금을 내는 조건으로 할인 받아 계약을 하게 됐다. 없는 돈에 그것도 참 다행이다 싶었다.


▲ 6개월 선불 조건으로 넘겨 받은 회원증 ⓒ김현동


4층이 여자 전용 층. 5층이 남자 전용 층. 무슨 생각이었는지 고시원 총무는 나를 4층 그것도 창문이 있는 복도 정 중앙에 배정해 놓고, 창문 없는 가격으로 계약해줬다. 홍일점이 아닌 청일점이 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낮선 여인들과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과 화장실과 샤워장을 가기 위해서는 한 층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편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6개월을 다 채우고 뛰쳐나왔다. 창문은 있었지만 높은 담벼락 위에 빼꼼하게 보이는 한줄기 빛이 너무 처량했다. 여자 전용층에서 남자가 생활하는 것도 시간이 갈 수록 불편해졌다. 늦은 밤 화장을 진하게 한 왠 여인네가 술냄새 풀풀 풍기며 귀신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껍(X) 식겁(O) 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와보니 갈 곳이 없었고 얼마 못가 다시 고시원으로 컴백. 다행히 고시원 총무는 그간의 나의 고충(?)을 이해했는지 이번에는 5층 게다가 가장 구석으로 내 보금자리를 마련해줬다. 용산이 내려다 보이는 나름 전망 좋은 고시원 생활의 시작. 타워팰리스에 버금갈 수는 없겠지만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이곳이 당시에는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최고의 방편이었다.


발도 못 피는 한 평 고시원 생활
내게 허락된 세상에서 유일한 나만의 공간
모든 것을 체념하고 6개월을 버티며 숨죽였다
결혼 안한 죄로 대출 거부, 돈 못 번다고 대출 거부
거부당하는 인생에 체념하는 것이 삶의 노하우


또 다시 해가 바뀌고 진지하게 방을 구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부동산을 돌아다녔다. 조금은 기대 했지만 대출은 여전히 되지 않았다. 미혼인데다가 월급 수령액이 적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뉴스에서는 서민의 삶이 어쩌며 대출이 어쩌며 하는 것은 거짓된 구호에 불과했다.

그래도 지하는 가기 싫었다. 곧 죽어도 남자는 우러러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해! 라는 나름 뿌리깊은 양반 가문의 옹고집이 발동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동근 출연의 '내 멋대로 해' 라는 드라마의 영향으로 옥탑의 인기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옥탑도 씨가 마른지 오래였다.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불법으로 증축된 용산의 빌딩에 싸게 입주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꽤나 오랜 시간 거주했다. 간혹 벌금 통지서가 건물주 앞으로 날라오는 것을 보며 '허물어지는 것 아니야?' 라는 고민을 하기도 했으나 그건 건물주의 걱정이지 난 세입자일 뿐이지 라며 쿨하게 무시하는 아량을 보이며 견뎌냈다.

그렇게 10년이 넘은 오랜 시간을 세월을 서울에서 버텼다. 달라진 것은 더 나은 삶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냉철한 현실 직시 능력이다. 얼마 전 결혼해 지내던 동기가 인천 청라 청약에 당첨되었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봤으나 이후 매년 보증금 상승으로 고민이다며 걱정하는 모습을 접해본 터라 더욱 현실이 됐다. 만약 나라면 대출을 받는다 쳐도 얼마되지 않을 월급에 이자 내고 월세까지 나가면 밥은 먹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용산 탈출을 공모하고 있는 요즘이 서울 생활 10년 만에 경험한 가장 큰 위기다.

ps. 네이버 스펙업커뮤니티의 뛰어보자폴짝 님의 재능기부로 3년만에 맞춤법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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