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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1인 가구 잔혹사, 아프다는 건~ 혼자 아프다는 건
위클리포스트
2017. 2. 28. 22:58
By 김현동 에디터 cinetique@naver.com
[2017년 02월 28일] - 혼자 살아본 이라면 으레 주변에서 하는 걱정 가운데 단골로 등장하는 한 가지가 몸이 아플 때와 연관된 내용이다. ‘혼자 살다 아프면 어쩔래?’ 누군 아파지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니지만 일단 나의 의지를 떠나 앓아눕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비상도 상 비상이라는 것이다. ‘괜찮겠냐?’부터 ‘도와줄 테니 언제든지 연락해라’는 친절한 걱정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물론 아픈 것을 가정해 고민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행위인 물을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생리적인 현상인 배변 또한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또한 곤욕스럽겠다고 생각은 해봤다. 살면서 마냥 건강하게 지내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아프면 유독 더 힘든 삶이 고독한 싱글만의 숙명이거니 라고 여기고 대범하게 받아들이리라 자신했다.
그렇게 귀가 닳도록 걱정을 들어 딱지가 생길 즈음 일이 터졌다.
40줄을 앞에 두고 덜컥 앓아누웠다. 대전 출장을 다녀온 직후부터 슬슬 허리통증이 느껴지길래 으레 장거리 운전 후유증이거니 쉬면 나을 거야~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1주일이 지나면서 허리에서 시작한 통증은 다리로 펴졌고 급기야 칼로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니 자연스레 얼굴은 오만상을 찌푸리게 된 것이다.
여태 까지 골골대지 않았고, 5년 전 딱 한 번 병원에 실려 간 것을 제외하면 몸에 칼을 대는 수술한번(멋모르고 강제로 당해버린 거시기 수술은 제외)안하고 살아왔기에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결정적인 것은 극심한 통증으로 눕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자세를 바꾸는 것까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상상 초유의 고통을 참아낼 의지를 다져야 할 정도로 극심했다는 것이다.
갈증이 심해져야만 마시는 물이기에 당연하게 식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해서 물을 대체할 수 있는 음료수도 없었으며, 쌀은 물론 대용품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에 환자 한 명이 덩그러니 누워 있는 셈이었다.
말 그대로 방의 역할에 너무나 충실했기에 척박한 5평 원룸에서 난 이를 악물고 끙끙 앓으며 병마와의 사투를 시작했다. 당일 오후 미팅을 끝내고 나서야 회사에는 몸이 너무 아파서 먼저 들어간다는 한마디만 던지고 무작정 들어온 방안.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들어 눕는 그 순간부터….'아 ~~ 죽는다는 소리가 절로 터졌다.
심지어 다리까지 당기며 정신세계를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지금 떠올려봐도 끔찍할 정도로 심했다.
그렇게 골골대는 병든 몸은 병과의 사투를 시작했다.
1일 차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애 처음 겪는 경험이었기에 전혀 대책 없던 당시
배고픔에도 통증에도 목마름에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이불도 못 깔고 누웠기에 맨바닥에서 대책 없이 뒹굴며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엉덩이와 등은 딱딱한 바닥에 오랫동안 누워 배기며 주기적으로 자세를 바꿔 달라는 신호를 보내왔지만 움직이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하루는 그렇게 버텼다. 목요일부터 시작한 투병은 금요일이 되면서 극으로 치달았고 SOS를 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솔직한 심경은 이대로 버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였다.
“나 병원 좀 가게 일없는 사람 나 좀 도와주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 병원 가야 하니 일 있어도 무조건 도와줘’가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행히도 회사 사람 중 한 명이 친히 보호자로 자진해 나섰고 어렵게 병원으로 향했다. 물론 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꾸부정한 허리로 대충 떡진 머리를 감고, 세수도 하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까지 한참 걸렸다. 평소라면 5분 안에 다 끝나는 일이 40분 넘게 걸렸고 간신히 차를 옮겨타고 가기까지 통증은 변함 없이 육신을 뒤흔들었다.
차를 옮겨타고 병원을 향하는 그 순간 과속방지턱을 넘는 것도 곤욕이었고, 가다 서다 하는 그때 몸이 살짝 밀리는 느낌도 통증으로 전해졌으니 고행길이 따로 없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험하던지. 마음은 대형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고통을 견디며 기다릴 자신이 없었기에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향했고 도착한 그곳에서 휠체어에 의지해 간신히 검사를 받았다.
조치는 신속했다. 도착 직후 주사를 두 방 맞았고, 링거도 맞았으며 의사는 친절하게도 “이 정도 상태라면 입원해야 합니다.”라고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 순간 난 머릿속으로 “입원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계산기를 두드렸고, 결국 현실과의 타협이 먼저였던 난 중증 환자였음에도 약만 타기로 결정했다. 물론 당시 나를 진료했던 의사는 “돈이 걱정이라면 병원비를 낮춰주겠다. 그러니 입원해라.”라며 배려했지만 그것조차도 석연치 않았던 나였기에 결국 진통제를 타오는 결정을 고집했다.
산다는 건~ 혼자 산다는 건. 잔혹한 일상의 연속
간병인 하나 없이 앓아눕던 쓸쓸한 기억
1인 가구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다시 집으로 오던 길. “물 두 병과 먹을 것 좀 사주세요.” 집에 아무것도 없었기에 누워서 버틸 재간이기에 최소한의 음식과 물을 요청해 상비했다. 그 길로 집으로 들어온 난 그대로 누워 한숨을 돌렸다. 진통제를 두 방이나 맞아 몽롱한 직후였음에도 통증은 밤새 계속됐다. 지끈지끈…. 욱신욱신… 거리는 통증은 2일째에도 여젼했다. 아침저녁으로 먹으라던 약이 남아나지 않았다. 통증이 심해 수시로 먹게 됐고 결국 복용량을 초과해 복용한 결과 7일분 약이 3일 만에 바닥나고 말았다.
그렇게 끔찍했던 아픈 일상은 4일째가 되어서야 겨우 엉거주춤 걸어 다닐 정도로 회복됐고 나 또한 간신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누워지내는 내내 보호자 한 명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병원을 가야 하는 그 순간에도 누구를 불러야 하지라는 걱정이 계속되던 지난 4일. 하지만 질문에 관한 해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병원 간호사는 힘들게 오는 나를 보고 한마디 했다. “환자분…. 혼자 오셨나요? 이 정도 아프면 119로 실려 오는데….”라며. 물론 나는 119는 아니지만 참을 만큼 참았으니 정말 대단한 참을성을 발휘한 셈이다.
그렇게 서러운 싱글의 숙명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4일간의 지옥 같은 투병을 끝내고 이렇게 한 편의 글로 당시의 기억을 남긴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아프다는 것은 더욱 큰 결단과 담대함과 상상하기 어려운 참을성이 필요한 의식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서너 장에 달하는 병원비 계산서와 친절하게 적힌 병원 처방전만이 당시의 치열한 병마와의 사투를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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