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뮤지컬 엘리자벳 :: 천박했던 귀족문화의 비아냥

생활/문화/리뷰

by 위클리포스트 2012. 3. 4. 19:43

본문


황후 하면 떠오르는 의미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여왕 혹은 황제의 여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칭호다. 오스트리아의 황후라는 자리를 꿰찬 여성의 일대기가 뮤지컬로 완성됐다고 했을 때 얼마나 대단한 내용이 다뤄지겠어 싶었다. 기대와 달리 펼쳐진 내용은 충격과 파격 그 이상이다.

한 여성을 권력과 사리사욕으로 난도질하는 장면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그 순간 관객의 마음 또한 함께 난도질 당해갔다. 마음 한쪽이 아려오면서 아프다. 그녀의 인생은 왜 이토록 참담한 것일까.

당장 보기에는 사치스런 장식에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장식이 눈 앞에 펼쳐지니 더 이상 호화스러울 순 없다. 일명 가진 자의 사치가 극에 달하는 궁궐에서 생활하는 여성이자 황후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다룬 주인공 엘리자벳을 두고 참혹하다고 표현하니 모순일수밖에.

보기에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온 그녀는 진정 행복했을까? 오늘날 모든 여성이라면 부러워 할만한 부와 배경 그리고 권좌까지 누려본 그녀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행복과 불행의 선을 아슬아슬 타고 있는 한 여인. 딱히 평하기 쉽지 않은 줄거리. 그래서인지 극은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져 정답을 갈구한다. 목 매달린 그림자 청년의 재판을 통해 “왜 엘리자벳을 죽였나”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작품이 끝나는 마지막까지 의문을 증폭시킨다.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궁궐내 법도를 따라야 했기에 철저히 교육받고 억압 받아야 했던 삶에 실증을 느낀 황후의 나약한 의지가 먼저 눈앞에 펼쳐진다.

치아가 누렇다는 이유로 박해받는다. 행동거지가 천하다고 하여 눈 밖에 난다. 여성이나 한 아이의 어미로써 당연했던 모성애조차도 궁궐 내에서는 사치라고 여겨지는 분위기라니 보는 이도 기막힐 노릇이다.

여느 여성과 같이 아이한 번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던 엘리자벳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주검이 되어 돌아온 어린것의 시신 뿐.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마음속에 싹튼 것은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해방감이 아니었던가!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간신히 되찾았다고 여긴 자유로운 삶도 그녀를 완전히 행복하게는 못했다. 나이가 들어 몸도 허약해지고 점차 정신도 피폐해지고 동시에 세상도 혼란에 빠져 소용돌이치던 그 마지막 순간까지 엘리자벳은 자유를 갈망했다. 그리고 결국 자유를 되찾았고 그 대신 내준 것은 죽음이다. 죽어야 사는 여자가 아닌 죽어서도 편히 눈감을 수 없는 세드엔딩 스토리다.


| 삶과 죽음을 다룬 비통한 뮤지컬

간절히 원하던 자유를 되찾아 준 죽음.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그림자를 통해 극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시작도 그랬지만 끝도 동일한 모습이 반복되는 오묘한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의 암살자로 나오는 그림자 역의 ‘루케니’에게도 100여 년간 반복된 질문만 되풀이 된다. ‘왜 엘리자벳을 죽였나?’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되찾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해 버린 엘리자벳의 삶. 종합해보면 엘리자벳은 비극적인 황후이자 국민에게 조차도 버림받은 황후와 다를 게 없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이 선택해준 것인데 누구에게 원망하겠는가. 때문에 46곡의 주옥같은 노래 모두에 경쾌한 리듬과 달리 애절함이 묻어나온다. 동시에 비통함도 느껴진다. 분노와 좌절이 녹아있고 주위의 이간질에 옳고 그름조차도 판결할 수 없게 된 주인공의 흐느적거리는 가치관은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다는 것도 담아냈다.

사랑 때문에 황후가 됐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삶. 어찌 보면 다 가진 자의 푸념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배부른 삶을 노래하고 있어 보는 관객의 마음도 마냥 불편하다. 겉으론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는 이의 속내는 이미 썩어 문드러져 피를 토하고 있지만 극은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데 있다고 지적한다.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주인공의 나약한 의지와 반복되는 불행으로 싹터버린 결말이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빗대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 극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

| 행복이란 단어로만 존재하던 상징.

다시 극은 시작도 끝도 없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사랑이라는 탈을 쓴 탐욕을 조건으로 만난 두 사람. 극중 만남의 과정도 그랬다. 천방지축 이던 엘리자벳의 어린시설 캐릭터 씨씨는 언니 헬레네의 맞선에 들러리로 나갔다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츠의 황후로 낙점 된다. 따져보면 본능으로 피어난 거래였기에 애초부터 행복할 수 없던 삶이다.

가문의 번성을 위해서라면 사촌끼리도 결혼을 하던 분위기였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비극적인 결말은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던가! 게다가 이쯤 되면 답도 나온다. ‘왜 엘리자벳을 죽였나?’는 질문으로 시작부터 연연하던 해답은 단순하다.

상징적으로만 존재했던 엘리자벳은 삶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었던 것. 뮤지컬 엘리자벳을 통해 조명하려 했던 것은 엘리자벳의 비극적인 삶이 아닌 부와 명예 그리고 정치적으로 양산된 물질만능주위의 부산물이다. 겉으론 화려하지만 속으로 텅~ 비어버린 껍데기 뿐인 캐릭터란 사실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애초부터 우리가 보고 있던 엘리자벳의 모습은 잘 가꿔낸 허상임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배경이나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해 따지기에는 다소 부족했지만 인간의 욕망과 정치적인 야망을 꽤나 흥미롭게 펼쳐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에는 흠잡을 데 없다. 엘리자벳 역에 김선영과 옥주현, 그림자 역으로 나오는 죽음에는 김준수, 류정한, 송창의가 열연했다. 

writtened by cinetique@naver.com ⓒ포스트온라인



관련글 더보기